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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은혜받은 자(속 사람의 능력,2011년10월9일, 성령강림절후열일곱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10.10 12:02 | 조회 2102


참 은혜받은 자

2011년10월9일(성령강림절후열일곱번째주일) 고후12:7-10

오늘 말씀 고후12:1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로운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러니까 아무런 유익이 없지만, 말이 나왔으니 하면서 마지못해 환상과 계시에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하면서 늘 괴롭힘을 당했던 것 중의 하나인 사도 바울의 사도성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유대교인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이 항상 사도 바울의 사도성에 시비를 걸고 인정하려들지를 않았습니다. 고후12:11에 보면 “. . . 여러분은 나를 인정해 주었어야 마땅합니다. 내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저 우두머리 사도들 보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고후11:5에서도 거짓 사도들에 대한 책망 속에서 12장11절과 똑 같이 “나는 저 거물급 사도들 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자기 변론을 합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이렇게 무시당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을 때, 참 속상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바로 오늘 말씀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말씀되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증명, 변증을 해야할 때, 사람들은 과장하기가 십상이고, 거짓말도 섞어 뻥튀기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사도 바울은 나에게 자랑할 것이 있으면 약한 것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에 앞서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1절 이하에서 자신이 체험한 환상과 계시에대해 이야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자랑 퍼레이드는 11장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1장에서 보면 사람들이 육신의 자랑을 들추어 내니 나도 한 번 내 육신의 자랑 좀 해야 하겠다 하면서 자신이 복음 때문에 육적인 고통을 받았던 사실, 그리고 자신의 가문, 족보, 학벌. . .등을 좌악 설파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계시에대한 자랑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전제를 하면서 신비와 계시에대해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신앙에대해 자랑을 한다면, 아마 내가 이렇게 열심히 봉사했다. 또 이렇게 훈련 받았다. 이렇게 신학 공부를 했다. 이렇게 기도 많이 했다. 어느 큰 교회의 장로다. 몇 때 째 목사, 장로 집안이다. 등일 것입니다. 또 영적 신비의 체험파가 있습니다. 병을 고쳤다. 신비의 환상과 계시를 보고, 들었다 등,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육체적 자랑, 체험적 자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랑할 거리가 있는데, 오늘 말씀 6절에 보니까 이렇게 자기 자랑을 해도 푼수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체험, 그 족보 자랑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육적, 체험적 자랑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순수한 자기의 모습으로 보아주지 않을 까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정말 자랑할 것이 딱 한 가지가 있는데, 나의 약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계시에대해 7절에 보면 ‘엄청난 계시’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계시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3층천 까지 갔다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하지 않겠다, 드러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마도 일반인이 체험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한 체험을 한 것 같습니다. 그 황홀함, 그 엄청남, 아마도 예수님의 변화산 체험과 같은 체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 때 베드로는 여기가 좋으니 이 곳에 초막 3을 짓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이 참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자기 자신과 받은 계시의 그 커다람을 동일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계시가 크고 엄청나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여전히 보잘 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들면 자기가 대통령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과 일치시키면 그것은 곤란하지요. 대통령은 직분일 따름입니다. 대통령 직을 감당하는 자기는 대통령 직분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자기가 본래의 자기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몸에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3 번씩이나 기도했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말씀 9절에서 사도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데서 완전하게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밀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약할 때 완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 10에서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살아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약할 때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귀한 지혜는 자기 한계를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자기 한계를 느끼지 않는 것은 괴물입니다. 암도 그렇습니다. 간혹 영화중에 괴물을 다루는 영화를 보게 됩니다. 그 괴물은 사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욕망이고, 이기심이고, 폭력이지요. 미녀와 야수, 지킬 박사와 하이드. . . 모두 인간의 내면의 욕망을 의인화 한 것입니다. 그 괴물의 특징은 폭력적이고, 정한 한계가 없이 남의 것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넘어설 때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도 폭력입니다. 그런데 약함은 우리에게 한계를 깨우쳐줍니다. 유한함을 깨우쳐줍니다. 지난 번 일본의 쓰나미, 원전 사고는 넘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예인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시29편 말씀을 공부했는데, 다윗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을 봅니다. 무려 6번이나 자연을 통한 여호와의 소리에대해 신앙을 고백합니다. 특히 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주님의 목소리가 물 위로 울려 퍼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로 말씀하신다. 주님께
서 큰 물을 치신다”라고 합니다. 물을, 큰 물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땅의 강줄기 뿐 아니라 바다, 오대양을 품으신다는 것입니다. 물을 마치 양을 치듯 가두어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온 천지 만물이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번 일본에 들이닥친 쓰나미 역시 하나님의 자본과 물질 문명에대한 인류를 향한 경고의 소리입니다. 더 이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선악과는 단지 결과론적으로 해석을 하면 죄의 문제를 풀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 모두 죄인이다 라는 교리적 해석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욕심이 죄를 낳는다고 합니다. 죄는 욕심의 문제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한계 없이 넘어가는 모습은 그대로 괴물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아주 실존적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는 여기 이 자리에 지금 이렇게 서 있습니다. 서 있는게 보이시지요? 저는 잘 보이는데, 안 보이시면 다시 한 번 마음을 닦고 보시면 보이실 것입니다. 성경은 에덴 동산 한 가운데에 선악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선악과는 현재, 이 자리 한 복판에 늘 있습니다. 과거나 미래에 저 지구 반대편 중동, 이스라엘의 어느 지점, 태고 때에 있었던 나무가 아니라, 나의 삶, 역사의 한 복판에 이 선악과는 파릇 파릇 푸르고 싱싱하게,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굳굳히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따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넘어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식물과 동물, 미생물, 무생물의 자리를 넘어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전15:40-44에 보면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들의 영광과 땅에 속
한 몸들의 영광이 저마다 다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들의 영
광이 다릅니다. 별마다 영광이 다릅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
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
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온 세상 피조물에대한 하나님의 지으신 섭리, 경륜, 질서가 있고, 그 역할에 따라 그 영광, 다시 말하면 그 피조물의 존귀함이 다 차이가 있고, 구별되어 있으며, 다르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구별되어서 거룩하다는 것인데, 우리 피조물이 하나님과 구별되어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는데, 그 뿐 아니라, 온갖 피조물들도 다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각자, 하나 하나, 돌부리 하나, 풀 잎 하나, 파리, 모기 하나 모두 다 거룩하며,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넘어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 만이 자꾸 넘어갑니다. 지켜주어야 하는데 넘어갑니다.

이 번 제주도 강정마을도 마을 사람 중에 소수의 사람을 불러다가 투표하여 마치 주민 전체가 허락했다고 하며 해군기지를 제주에 세우려고 합니다. 지금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이 해군기지가 강정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뿐 아니라 지식인들, 종교인들, 시민 단체들 대부분이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해군기지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데,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하여 폭력적으로 해군기지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 아름다운 천연의 구렁바위를 시험적으로 폭파하였다고 합니다. 폭력입니다. 국가의 폭력입니다. 웃기는 것은 지금 어느 단체인지도 불분명한 단체가 세계7대 경관 등록하기를 하는데, 그래서 제주도가 등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지고 제주도와 정부가 난리도 아닙니다. 제주도의 천연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려 관광사업의 가치를 높이겠다는 것인데, 그런면에서도 천연의 구렁바위를 부수고 그 위에 해군기지를 세운다는 것은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무지막지하게 수도 없이 선악과를 따서 먹었습니다. 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계를 깨닫게 해주고, 그것이 얼마나 잘 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약함입니다. 특히 인간의 가장 약점인 병, 불치의 병은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개인적인 그래서 이기적일 수 있는 연민이 아니라, 바로 불쌍히 여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긍휼입니다. 병 약함은 원수지간을 뛰어넘어 우리 모두로 하여금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보게합니다. 바로 약함입니다. 부족하고, 힘없어 함께하는 것들과 나에게 있는 것을 나누어야 기쁘고, 복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동안 무심했던 나와 함께하는 것에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합니다. 은혜입니다. 약함은 은혜입니다. 강함은 은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9,10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
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 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
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은혜입니다. 법이 아닙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노회가 열렸는데, 노회장 선거에서 쌍방 간에 반칙을 범했습니다. 한 쪽은 지교회 교인이 아닌 다른 교회 목사님이 선거 운동을 하여서 불법을 행했고, 다른 목사님은 선거 당일 하루 전 까지 만 선거 운동을 하게 되어 있는데, 선거날 핸드폰 문자를 날려서 불법인니다. 그런데 선거에서 20여표차로 떨어진 목사님이 ‘불법이요’라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또 한 쪽에서 그렇다면 ‘법 이요!하며, 법대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창 설전이 오고 갔데, 결국 선거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해 주기로 했는데, 즉 타 교회 목사님이 선거 운동을 한 거나, 핸드폰으로 문자를 돌린 것이나 선거법 위반은 하였도 본인 스스로 불법을 행한 것에대해 사과를 하였기 때문에 이 번 결과를 인정한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간 제 생각은 ‘법이요 하는데’ 노회에서 ‘법이요!’하면 어떤 주장도 설득력을 잃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가 있습니다. 물론 ‘법이요!’하는 말과 달리 실제 노회 때 사용되지는 않지만 ‘은혜요!’하면 모든 것이 풀립니다. 이 번에도 사과하고 인정했습니다. 인정했다는 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죄가 있는데, 죄가 없는 것 처럼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가 그 은혜를 입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가 베드로 파다, 아볼로 파다 해서 분쟁이 있다는 소식에 오늘 말씀의 편지 중 고전4:7을 보면
“누가 그대를 별다르게 보아줍니까?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받아서 가지지않
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하면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 있으면 한 번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랍니다. ‘돈으로 샀지!’합니다. 그럼 그 돈은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가 아침에 먹은 밥, 입고 있는 옷, , , 나의 모든 것이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의 가시가 있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 합니다. 하나님께 그 가시 제거해 달라고 3 번이나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라는 응답이 왔습니다. 무 응답의 응답이 왔습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제를 환하게 응답받아야 속이 시원하고, 그렇게 해결이 되어야 응답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보니 ‘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이제 그만 ‘됐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냥 나에게 있는 것 그대로 품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응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은 해결되지 않은 온전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감람 산에서 그 십자가를 원치 않는다고 기도하였지만 그 기도에대해 하나님께서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가시, 고통스럽고 힘든 가시를 감사합니다. 음식을 먹다가 목에 작은 가시 하나라도 걸리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가시를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강함으로부터 오는 능력이 아니라 약함으로부터 오는 능력입니다. 가시를 감사하는 속사람의 능력입니다. 마치 진주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려고 살이 찢기는 아픔을 견디어 내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감당함으로 온 인류가 죄 용서의 은혜를 입었듯이 말입니다.

약한 것이 나를 온전하게 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가끔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는 것 보다 받는 것이 귀합니다. 문제는 받은 것 귀한 줄 모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좋은 것 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가문, 학벌, 명예 등, 그러나 정말로 귀한 선물을 몸에 가시라 했습니다. 가시를 감사하는 속 사람의 능력의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 은혜가 넘치면 자연스럽게 나누어지기 마련입니다.

교우여러분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없어졌으면 좋겠어 하는 것이 사실은 나를 완전케 하는 고리요, 초석입니다. 이러한 삶의 약한 것들을 감사할 수 있는 참 은혜의 사람, 속 사람의 능력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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