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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에 들어가자(2011년9월25일, 성령강림절후열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9.25 15:20 | 조회 2442


안식에 들어가자

2011년9월25일(성령강림절후열다섯번째주일) 히4:1-11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날에 쉬셨습니다. 안식은 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은 숨을 쉽니다. 쉼과 숨에는 재미있는 언어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숨을 쉬는 것은 산소를 마시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렇게 생명의 모습은 산소를 드리 마 쉬고, 내 쉬고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응급조치 중의 하나가 기도를 확보하여 뇌의 산소 공급이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숨, 호흡은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쉬다’라는 말은 글자그대로 피로를 풀려고 몸을 편안히 두는 것, 잠을 자는 것, 잠시 멈추는 행위 등을 쉰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숨이라는 말의 뜻을 보면 ‘사람이나 동물이 코 또는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기운’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숨을 쉰다’라고 하면 숨을 멈춘다는 것 아닌가 십어서, 사전을 다시 찿아보니 ‘쉬다’라는 말에는 ‘입이나 코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보냈다’하는 뜻이 있더라구요. 참 희안한 단어입니다. 두 가지 상반된 의미가 한 단어 안에 포함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숨을 쉰다라는 말, 호흡한다는 말 속에는 쉬어야 한다는 의미, 멈추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음식이 부패하기 시작하면 ‘쉰다’라고 합니다. 목에 탈이 나도 목이 ‘쉰다’라고 합니다. 잘 못 쉬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쉰다라는 말, 호흡한다는 의미의 쉬다라는 말 속에 편안히 잘 놓아두는, 아무 것도 하지않고 그대로 멈추어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숨과 쉼의 언어적 관계 속에는 영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거칠게 숨을 몰아 쉬어, 허파와 심장을 피스톤처럼 박동케 하는 것도 생명력이 있어 중요하지만, 한 편으로는 숨을 고르게 편히 깊은 호흡으로 멈추듯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지금 매 주 수요일 요가는 참 배울만한 몸짓이 아닌가 십습니다. 기체조, 또 호흡과 관련된 행위, 몸짓이 전통적으로 나라와 민족 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숨이라는 것이 얼마나 생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백암에서 농촌 목회하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창 농번기 때가 되면 주일 날 오전 예배 마치고, 함께 식사를 한 다음에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바로 논 밭으로 달려 가서 일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녁 예배에 맞추어 허겁지겁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안스럽기도 하고 해서 아예 주일 저녁 예배를 낮 시간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예배 마치고, 공동체식사하고, 그리고는 바로 저녁 예배를 낮시간에 당기어 드린다는 것입니다. 예배, 그리고 안식이 일을 하는데, 그리고 아주 바쁠 때에는 거치장스럽고, 귀찮다는 느낌입니다. 저녁 예배 때문에 일을 못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것은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안식의 전부인 것으로 오해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의주의로 가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몸과 영이 쉼,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6일 동안 일하고 또 주일날 예배드리고 가서 또 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쉼을 위해서인데, 사람들은 안식일을 예배드리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점심식사 후에저녁에 드리는 예배를 오후에 드리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그 낮 예배를 성경공부로 바꾼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전에 바로 예배가 끝났는데, 점심먹고 또 예배를 드리려니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공부가 여러면에서 더 효율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경배와 찬양의 시간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이런 편의주의 속에는 안식의 평화, 감사, 여유, 자유함은 없지 않나 십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 교회는 주일 오전과 오후 예배, 그리고 수요 예배를 드립니다. 구역예배도 있습니다. 이 예배들의 중요한 의미 중에 하나는 우리를 우리의 생각과 일상의 일, 무수히 많은 관계를 멈추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숨도 있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에는 멈춘다는 뜻도 있다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교회가 드리는 예배는 우리를 우리의 일상을 멈추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멈춤입니다. 그리고 영적 숨을 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일상의 것과의 구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룩한 날이라고 하는데, 거룩하다고 하는 것의 의미는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러면 다른 날이 천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것들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여섯 요일은 거룩하지 않으니까 천박한 것이 아닙니다. 여섯날도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주일은 정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 돌려드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가 주일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저녁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침부터 저녁 까지 온전히 주의 날임을 고백하는 것이요, 참 안식, 평안의 하루가 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일에 일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피곤하고, 지치게 하며, 힘들었던 몸과 마음을 재 충전할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일의 노예, 일과 모든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관계, 자기 자신에 집착해 있는 사람을 그의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가능한 주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껏 그렇게 해 왔습니다. 간혹 무엇을 했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특히 성경 공부, 기도에대한, 그러나 그 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을 묶어둘까 주일 오후 자유롭게 은혜 안에, 기도할 사람 기도하고, 성경읽을 사람 성경 읽고, 텃 밭 가꿀 사람 텃 밭 가꾸며 은혜 안에 성도들과 함께 머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 아직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저녁에 오늘 하루를 마감하며 새로운 시작을 향해 함께 모여 찬양, 기도 말씀을 통해 새로운 주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일 저녁에 드리는 예배는 남다릅니다. 오전과 저녁의 분위기 자체가 틀립니다. 공기 자체도 틀리지요. 오전 예배 때 부르는 찬양과 저녁에 부르는 찬양의 맛이 틀립니다. 그리고 하루의 시작은 성서적으로는 아침 해 뜰 때가 아니라, 저녁 해 질 때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도 아침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주일 새벽 해 뜰 때 끝이 납니다. 하루의 시작이 세상과 성서는 다릅니다. 그래서 주일 드리는 예배를 저녁에 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 우리가 날 마다 지내는 저녁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아마도 우리의 인생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저녁 마다 술을 먹는다면, 그것은 영적 시간상 시작부터 술인 것입니다. 저녁 마다 가족들이 T.V 앞에 앉아있다면 하루를 바보상자 앞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녁에 어떤 대중매체 없이 생으로 가족들이 함께하여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또 독서와 간단한 체조와 여러 차별화된 것들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특히 가족이 드리는 예배가 그 저녁 시간에 그러니까 하루의 시작하는 시간에 포함되어있다면 아마도 우리 내 삶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인위적인 종교성에 메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아미쉬라는 공동체가 있는데, 이 곳에는 예배당도 없고, 헌금도 없고, 악보 없는 찬송가를 400여 년간 불러오고 있으며, 성경 공부 시간도 없고, 전문 교육을 받은 성직자도 없으며 전도사와 선교사도 없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가족 끼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 속에는 공동체 밖의 세상 사람들, 기존 교회의 사람들의 삶과 차별화된 순박, 검소, 여유, 평화, 사랑으로 가득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프로그램에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공동체 전체가 하나가되어 신령과 진정으로 삶으로 예배드리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고기 교회는 물론 프로그램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인위적인 프로그램은 지양합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 모두에게 찿아와 함께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긴장감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편의주의적으로 가는 것도 사양합니다. 수요일 저녁에는 성경강해를 합니다. 새벽에는 성경읽기표의 말씀을 읽고 기도의 제목을 놓고 기도합니다.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40일 작정기도 와 같이 작정한다거나 특별이 제목을 놓고 기도하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기도제목을 올려놓고 기도를 합니다.

몇 일 전에 체코에 오랫동안 선교사로 있던 이종실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교회 이야기를 하다가 한국에서 온 교회의 교인들이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 오면 견디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도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고 하면, 이종실 목사님이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느냐고 다시 묻는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의 수 많은 프로그램에 익숙해져서 그 프로그램을 하는 것, 열심히 하는 것이 신앙인 것 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 생활과 교회 밖의 삶이 완전히 이원화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물질에 붙들린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 가치에 연연해 합니다. 그런데 이종실 목사님 이야기가 체코 교회 교인들과 한국 교회 교인들과 차이가 하나 있는데, 비록 체코 교회는 잃었던 신앙을 이제야 다시 찿아 규모나, 여러 종교적인 틀로 볼 때 별로 내세울 것 없는 것 같지만, 분명한 것은 체코 교인들은 교회의 삶과 교회 밖의 삶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쉰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혹 쉼 중에 마인드 콘트롤이다, 심리치료 등 많은 정신적인 치유 활동들과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보면 이 것 좋다하면 모든 것 제쳐놓고 올인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절에서는 템플 스테이를 통해 현대인들, 도시인들의 심신을 쉬게합니다.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교회의 쉼은 좀 다릅니다. 육과 혼(soul, 정신, 심리, 의지, 이성 등)을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spirit)을 쉬게하는 것입니다. 영이 어떻게 쉴 수 있을까요? 숨을 쉴 수 있을까요? 오늘이 주일인데, 이 주일에 어떻게 안식을 얻을 수 있나요? 영이 살아있다, 살아 숨을 쉰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살 수가 있을까요? 다시 말해 숨을 쉴 수 있을까요? 동물들은 사람도 그렇지만 새끼들은 어미를 따릅니다. 오리는 처음 태어날 때 보이는 그 물체를 자기 어미인줄 알고 그 것을 쫓는다고 합니다. 다른 생명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 때 엄마와 아빠를 쫓습니다. 금요일에 1구역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윤빈이가 엄마에게 바짝달라 붙습니다. 귀찮을 정도로 안깁니다. 성격적으로 내성적인 아이는 그런 정도가 겉으로는 들 표현되더라도 마음은 역시 엄마, 아빠에대한 절대 신뢰일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태어나면 낳아준 분을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서 쫓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나지 않으면, 낳아준 분이 없으니 따를 분이 없는 것입니다. 낳아준 분을 따르지 않아도 나름대로 자기 살 길 찿아가기 때문에 구태여 간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목이 마려워 물을 찿듯이, 사랑이 마려워 아이가 엄마나, 아빠를 찿는 것처럼, 태어난 영은 하나님이 마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육적으로는 정신적으로는 예수 믿기 전의 이어령님 처럼 잘 살 수 있지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지요. 세상의 일에 깊이 빠져 인정받고 칭찬 받을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 모르고 사는 것이지요. 영적 생명의 삶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42:1은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
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좀 고상한 표현을 쓸 법도 한 대, 아주 원색적입니다. 그런데 생명에 관한한 원색적입니다. 거기에 옷을 입히고, 색칠을 해 봐야, 오히려 생명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왜 헐떡이는가 하면 생명이 목말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호흡을 하지 못하면 질식해서 죽는 것 처럼, 영으로 호흡을 못하니 죽을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사슴이 한 여름 뛰다가 골자기로 내려가 목을 축이는 것 처럼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갈증을 체우기 위해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고자 한다면 당연히 갈급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기가 부모를 찿듯이 주일 오전 예배 보고 끝이 아니라, 주일 저녁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아니 수요일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불연듯 수요일 저녁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그 갈급함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멈추게 하십니다. 이제 영적으로 숨을 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틀이 아주 보잘 것 없는 것 같지만 콩나물에 물 주듯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아침 이슬에 바지가랑이 젖듯이 그렇게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더라도, 정해진 담백한 틀 속에서 영적인 깊이와 넖이, 높이가 자라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겨자씨가 자라 새들이 찿아 와 쉬듯이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1,9절에서 안식에대한 약속이 아직 남아있다고 합니다. 3절에는 그 말씀을 믿는 우리는 안식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에게 궁극은, 성도 들에게 남아있는 귀한 은혜는 안식, 믿음의 안식입니다.

수1장에 보면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이미 루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 중의 반은 요단강 동쪽 땅을 차지하였는데, 그 때 여호수아가 그들 3 지파에게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며 안식을 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가족과 가축을 요단 동편 이 곳에 남겨두고 다른 지파와 함께 요단 강을 건너 형제 들의 땅과 형제들의 안식을 위하여 싸우자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언제까지인가 하면 수1:15에 보면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들 동기들에게도 편히 쉴 곳을 주실 때까지’라고 합니다. 이 짧은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안식은 어느 한 쪽 만의 안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봅니다. 함께하는 모든 이들의 안식이어야 합니다. 레위기를 포함해 모세 오경을 보면 이 안식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노예와 종들, 더 나아가 범죄자들, 가축들, 그리고 땅과 식물에 이르기 까지 전 피조물의 영역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시작은 출애굽입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의 도착점, 궁극의 목표는 억압과 고통, 우상숭배, 욕망, 죄의 굴레에서의 해방인데, 그 방향의 긍국은 여호수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함께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는 안식입니다. 신5:12-15에 보면 십계명 중의 제 5계명인 안식일에대한 계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엿새 동안 일을 힘써 하는 대신에 일곱 째 날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되고 쉬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쉬는 동안 자신만 쉬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것의 안식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남종, 여종, 소, 나귀, 집짐승, 식객 ... 그러면서 남종과 여종은 똑같이 쉬어야한다고 하면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너희는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라 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 합니다.

성경에 명령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조건적일 수 없을 때, 그러니까 무조건적일 때 나오는데, 주로 생명과 관련될 때 명령합니다. 대표적으로 십계명이 그렇습니다.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에게 전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참 안식을 주는 계명입니다. 그 중 안식일에대해 말씀하는 15절에서 보면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
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고 합니다. 문장을 잘 풀어 보면 내가 너희를 노예로부터 자유로, 해방으로 인도하였는데, 이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지키는 것은 자유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돌아섰는데, 그 자유를 지키려면 안식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럼 안식하는 것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지에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식하지 않으면, 쉬지 않으면 다시 노예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명없이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두 총각이 살고 있었습니다. 두 총각이 겨울에 땔 나무를 하러 뒷 산에 올랐습니다. 서로 누가 더 맣이 나무를 할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산에 올라 나무를 베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은 정말 쉬지않고 나무를 베고 자르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은 열심히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쉬엄쉬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저물 때에 그날 한 나무를 지게에 지고 내려오는데, 쉬지않고 열심히 땀을 흘린 친구 보다, 쉬엄쉬엄 나무를 한 친구의 등짐이 훨신 많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땀흘린 총각이 하도 이상해서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야! 너는 내가 열심히 나무할 때 쉬엄쉬엄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나보다 나무를 많이 했냐, 거 참 이상하네” 하며 의아에 했습니다. 그러자 쉬엄쉬엄하던 청년이 그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응, 그건 쉴 때 톱하고 도끼의 날을 갈았거던!” 그렇습니다. 쉼은 창조의 질서, 생명의 질서인 것입니다. 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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