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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에대한 소망(2011년9월11일, 성령강림절후열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9.18 14:59 | 조회 2213


약속에대한 소망

2011년9월11일(성령강림절후열세번째주일) 행26:4-8

사도 바울은 철학자요, 성서학자요,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로마시민권을 가진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요, 종교인이였습니다. 촉망받는 유대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체포당하는데, 그 때에 한 말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바울은 당시의 유대 왕이었던 아그립바 왕에게 자기가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에게 주신 약속에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유대인들이 모두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같은 약속을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이 같은 소망을 가진 바울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까지 했을까요?

이해가 안갑니다. 도대체 무슨 약속이길래 한 유망한 유대인 청년을 재판정에 세우는 것일까요? 당시 유대의 로마총독이었던 벨릭스 앞에 섰을 때, 유대인들은 바울에대하여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
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
그가 성전까지도 더럽히려고 하므로, 우리는 그를 붙잡았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한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율법과 민족을 거스르는 자요, 성전을 더럽힌 자라고 고소를 합니다. 그래서 온 예루살렘이 시끄러워졌고, 이 소란을 멈추기 위해 로마의 천부장은 바울을 로마군 병영 안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바울의 변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26:20에서
“먼저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으로 온 유대지방 사람들에게, 나
아가서는 이방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였”다고 하면서
“이런 일들 때문에, 유대 사람들이 성전에서 나를 붙잡아서 죽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맨 처음에 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까지 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약속에대한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유대인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밖았고, 또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다시말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소망을 전하는 바울 또한 죽이려 한 것입니다. 바울은 체포당하여 벨릭스 총독과 대제사장 그리고 아그립바왕에게 재판을 받습니다. 행21-26장이 바로 그 심문의 과정과 바울의 변론을 잘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이 재판과정 속에서 바울은 소망에대한 이야기를 23:6, 24:15, 그리고 26:6-8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에대한 이야기를 할 때 3번 다 빠지지 않고 언급하는 것은 죽음과 부활입니다. 26:8에서 바울은 아주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여기
십니까?” 교우여러분 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희망인 것을 믿지 못하십니까? 왜 몸이 다시 사는 부활을 소 닭 보듯이 합니까? 기독교의 희망은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합니다. 세상의 희망이 어떤 것인지는, 다른 종교가 말하는 희망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희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오는 희망입니다. 전 지금도 이 희망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어두움과 절망, 폭력과 욕망으로 뒤 덮일지라도 내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의 희망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 이 기쁜 소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약속에 소망을 두고 있다는 그 약속은 어떠한 약속인가요?무슨 약속일까요? 그리고 그 소망에대해 사도 바울이 23:6, 24:15, 그리고 26:6-8에서 거듭 언급하듯이 죽음과 부활에대한 희망에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이 소망 속에는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과 죽음은 서로 안 맞을 것같은데, 교회가 이야기 하는 소망에는 죽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막14:24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 때 포도주를 드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라고 합니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에 소망을 두고 있다고 했는데, 주님이 제자들과 포도주를 나누시며 하신 이 언약의 피가 바로 그 약속인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 앞에서 이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면서 이 포도주가 자기의 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이 만찬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 뿐만이 아니라 25에 보면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이 만찬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이며, 그러나 다음에는 하나님 나라에서 모두가 새로워진 그 날에 새로운 포도주를 나눌 것이라는 죽음 이후의 비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여간 예수님은 이 죽음이 약속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약속일까요?

렘31:31-33에 보면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
이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
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
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
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새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문자로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주었던 것 처럼 돌판에 눈에 보이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 판에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새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통해 그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않고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 예수님께서 어린 양 같이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히9:13,14는 이 죽음에대해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려도, 그 육체가 깨끗하여
져서, 그들이 거룩하게 되거든,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우
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롬6은 이 죽으심에대해 죄에대해 단 번에 죽으신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아! 교회가 이야기 하는 소망은 죄에대한 것이구나 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죄가 바로 우리를 어두움에 붙들어 멥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죄의 죽음에대해 단 번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이해가 잘 안되지요. 죄에대해 이겨야하는데, 죄에대해 죽었으니 죄가 이긴 것이 아닌가 십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가 사람들을 획책하여 자신을 십자가로 내 몰을 때,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묵묵히 그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준비하신 죽으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아버지 하나님께 원치 않는다고도 하셨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죽음으로 더 이상 죄가 주님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롬6:10 말씀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롬6:5는 우리에게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부활에 있어서도 주님과 연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요?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요? 빌2:6-8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
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
기를 낮추시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합니다.

약속에 소망을 두고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그 소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십자가의 죽으심은 낮추는 것이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다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생명까지도 내어놓으셨습니다. 단 번에 주저하지 않으시고,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죽으신 주님을 살리셨습니다. 부활시키셨습니다. 행2장에서 베드로는 거듭 선포합니다. ‘당신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그리스도가 되게하셨다’고 행2:36에서 선언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찔려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우여러분 십자가와 부활 앞에 자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회개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죄에대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처럼 죽지않으면 하나님의 다시 살리심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활도 없고, 그러면 희망도 없고, 그렇게 되면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물 흐르듯이 내려온 언약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 참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욕심이 살아있습니다. 욕망이 살아있습니다.

홍세화씨가 처음 입국허가를 받고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들은 말 중의 하나가 ‘부자 되세요!’였다고 합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를 힐난하는 반어법의 어조가 담긴 것으로 이해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들었을 때였다고 합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박한 사회라 할지라도 ‘배부른 돼지’를 지향하는 사회가 아니라면 넘어선 안 되는 선이 있어야 하는데, 이 사회가 이미 그 선을 넘어 ‘소유’(당신이 사는 곳)가 ‘존재’(당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T-바이러스에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포를 살리는 바이러스라고 하는데, 요즈음 줄기세포도 그러한 일종의 생명연장을 위한 생명공학연구이지요. 그런데 이 T-바이러스는 사람이 죽은 후에 작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DNA를 변형시켜서 탄생환 유전자 변형균인데, 처음에는 정말 새로운 변형 유전자를 만들어 냈는가 했더니 좀비 영화이야기더라구요. 그런데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정말 끔찍할 것입니다. 식욕이 생기고, 그러나 뇌세포는 죽은상태, 좀비이지요. 영혼은 죽었는데 몸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살기만 하려는 모습입니다. 암 세포가 그렇잖아요, 죽어야 하는데 죽지않고 살려고 합니다. 가난한 것이 인간의, 아니 모든 피조물의 궁극의 모습인데, 모두 부자만 되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지금 동시대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죽지않는 T-바이러스에 심각하게 오염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욕망이 끝이 없습니다. 언젠가 연말 연예 프로 시상식에서 한 코메디언이 ‘영혼을 팔아서라도 웃겨드리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말이 문학이나, 예숙 작품 속에서 어떤 경고의 메시지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언어인데,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 와 버렸습니다. 엄연히 상호간에 인류가 넘지말아야 할 것 들이 있는데, 이렇게 막 넘어들어오는 것을 당연시하는, 인덩하는 폭력의 시대입니다.

설교준비하느라 ‘부자되세요!’라는 문구를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였는데 여러 가지 정보들도 뜨고, 동영상도 뜨는데, 놀라웠고, 충격적이었던 것은 동영상에 교회 십자가가 보이드라구요, 설마했는데,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 동영상을 크릭 해 보았는데, 어느 교회의 수요 예배 동영상인데 앞으로 15주에 걸쳐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부자되는 것을 공부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합리적인지 모릅니다. 세상이 부자되세요하면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에까지 이 욕망의 죽지않으려는 바이러스가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세상은 물론이고, 진리의 보루여야할 교회가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소망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오는 소망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성도가 따라야 할 일은 롬6의 말씀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죽음을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죽어야 소망이 있습니다.

강정마을에 공권력이 투입되었습니다. 고유기 범대위집행위원장이 구속되었는데, 이 분은 제주도 토박이로서 청년 때부터 15년 동안줄 곳 시민운동을 해 왔는데, 그 중 10년은 강정마을에 들어서려는 군사기지 문제를 끌어안고 이제 껏 지내 왔습니다. 그러다가 이 번에 강정마을 강동균 회장과 함께 구속되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돈되는 일 아닌 15년 동안, 특히 10년 동안 강정마을 지킴이로 살아왔습니다. 아런 분들이 지금도 곳곳에 이름없이, 빛 없이 살고계십니다. 그 분이 옥 중에서 이런 편지의 글을 써 보냈다고 합니다. 그 중의 일부입니다.

“어느 가을 오후, 높은 하늘을 배 위에 올려놓고 구렁비 바위에 팔베게하고 누워있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가을의 파란하늘과 맞닿은 바다 지평선 아래로 산호들은 날마다 새로운 꽃을 피우고 있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실은 수백 년 동안의 진실이었는데, 해군기지라는 거대한 괴물은 이 엄청난 진실을 기억과 그것으로부터 상상의 감옥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그 수백년의 진실을, 다가올 가을 하늘 어느 날의 오후의 현실로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이 감옥의 창살쯤이야 차라리 함께 산길을 넘는 벗일 뿐이다.”

고유기 위원장은 해군기지 건설을 거대한 괴물로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라 곳곳이 이렇게 좀비같이 영혼이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의 일로,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괴물 같은 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이 때 교회는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 다른 죽음이 아니라, 영웅스러운 의로운 죽음이 아닌, 자연사가 아닌,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의 죽음을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활이 있고, 소망이 있고, 언약이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죽을 수 있어 부활의 소망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이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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