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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을 넘어(2012년 8월12일, 성령강림후열한번째주)

하늘기차 | 2012.08.12 15:18 | 조회 2052


허상을 넘어
2012년 8월12일(성령강림후열한번째주) 창17:1-8

창12장에서부터 믿음의 조상들에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의 시작은 11장30절 부터입니다. 그 이야기인 즉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직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기 전 아내 사라가 아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성경의 주요 주제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시대야 결혼에대해서도, 그리고 자녀에대해서도 그렇게 애착이 없지만 고대시대에 자녀는 그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에서 조상들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그리고 창세기 끝에 이르러서는 자손이 수 없이 뻗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자손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뻗어나가는 가에대한 것이 믿음의 주제와 연결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이 부르셔서 자식에대한 약속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믿음의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믿음의 여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여행에 동반자가 있습니다. 바로 동생 하란의 아들 조카 롯입니다. 조카 롯은 여행의 처음부터 아브라함과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끝을 맺는 것을 봅니다. 시작은 같은데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다 아시겠지만 롯은 물이 넉넉한 요단 동쪽의 땅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성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창13:12에 보면 롯은 소돔 가까이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13절에 보면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주님을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고 합니다. 엎치락 뒤치락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간이 흘러가는데 아브라함은 끝 까지 하나님과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약속을 거듭 갱신합니다. 그러던 중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었을 때에 여전히 아브라함에게 후사가 없을 때에 어느날, 이렇게 후덥지근한 한창 더운 나른한 오후에 아브라함이 장막 어귀 마므레 상수리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을 때에, 창18장에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나셨는가 하면 세 사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마므레 상수리 나무 아래 더위를 피하여 앉아 있었는데, 비몽 사몽 간에 고개를 들어 보니 웬 사람 셋이 맞은 쪽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2절에 보면
“달려나가서, 그들을 맞이하며,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중동에서는 손님을 반가히 맞이하는 관습이 있습니다만 지금 아브라함은 자기를 찿아온 사람들을 VIP대접을 한 것입니다. 물론 중동 사람들의 관습이기도 하지만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세 사람을 융숭하게 접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무언가 아브라함에게 느낌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방점을 찍을 때가 되지 않았난 하는 때를 어림잡지 않았겠난 하는 생각이 듭니다. 75세에 믿음의 삶을 시작하여 우여 곡절을 격으며 이제는 기다림에 익숙해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날도 더운 여름 오후 상수리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기도, 묵상을 하고 있지 않았겠나, 그러다 졸기도 하고 하다가 비몽사몽 간에 하나님의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듬해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에대한 약속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무렴에 두 천사가 역시 롯에게도 찿아 옵니다. 그런데 롯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메시지는 소돔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롯은 소돔에 이르러 결혼도 하고 그래서 딸들을 낳았고, 그 딸들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창11장 30절의 아이가 없다는 것에서 시작한 믿음의 선조들에게 자식에대한 연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롯은 이미한 가족을 이루었지만 아브라함은 아직도 자식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제야 99세가 되어 아들에대한 시간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때부터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말씀드렸지만 천사들은 롯에게 소돔을 떠나라 합니다. 그런데 창19:16을 보면 ‘꾸물거리고 있다’고 합니다. 떠나야 할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것도 급히 떠나야 하는데 말입니다. 롯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일들에 묶여있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아들의 소식을 전해듣고 사라는 장막어귀에서 웃었다고 합니다. 월경이 그치고, 남자의 기능을 잃은지 오랜 사람들에게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상상을 해 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99세가 되어 페경한지 오랜 할머니의 침실에 드는 늙은이의 모습. 그 숭고함, 그 아름다움 말입니다. 말씀 앞에 고개 숙인 노 부부의 모습은 참 잔잔한 감흥을 줍니다. 그런데 롯은 어떤지요. 소돔이 멸망 할 때 롯이 여전히 머믓거리자, 두 사람이 롯과 아내, 그리고 두 딸을 잡아 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내는 두고온 것들에대한 미련으로 뒤 돓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권면을 무시하고 뒤를 돓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맙니다. 결국 롯은 두 딸과 간신히 몸만 빠져 나오게 됩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러니까 두 딸이 결혼은 하였지만 자식이 없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식에대한 약속을 받은 상황이고요, 문제는 세상 방법에 익숙해 있는 롯의 딸들의 모습입니다.

창19:30 이하에 볼 것 같으면 소돔을 빠져나온 두 딸에게 남자도 없고, 자식도 없자 모략을 꾸밉니다. 아버지에게 술을 대접하여 취하게 하여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 아버지에 씨를 받자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큰 딸이, 그 다음 날에는 작은 딸이 아버지의 침실에 들어갑니다. 37,38에 보면 그 자손들이 바로 암몬과 모압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늘 싸움을 일으키는 족속이 되었고, 지금도 중동은 그렇게 싸우고 있습니다. 롯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죄가 어떻게 우리를 붙들어 매는지의 모습을 봅니다. 죄가 우리를 어떻게 무력화 시키고, 결국 욕망에 철저하게 붙들리어 하나님 뜻이 아니라 죄의 욕망에 붙들려 마지막을 술에 취해 비참하게 결말을 맺는 모습을 봅니다.

롬7장 마지막에서 사도 바울은 “아! 나는 비참한 존재이구나!”라고 실토합니다. 이미 사도 바울은 이러한 롯과 같은 인간의 실존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라고 하면서 장탄식을 합니다. 철학에 있어서의 실존은 잘 모르지만 기독교는 죄로 말미암은 실존을 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이 도둑질, 강도, 거짓말 뿐만아니라, 죄로인하여 나타나는 좌절, 무능력, 무력감, 끝없는 욕망, 집착, 등의 결과로 어찌할 줄 모르는 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천사를 보내어 소돔이 멸망할 것에대해 롯에게 알립니다. 서둘러서 소돔을 떠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창19:16을 보면 ‘꾸물거리고 있다’고 합니다. 떠나야 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도 급히 떠나야 하는데 머뭇머뭇 우물쭈물 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빠져나와 광야로 나아가자 마자 복병을 만납니다.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뒤에서는 이집트의 군대가 추격하여 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은 우리 인생의 여정에 적지 않게 찿아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죄의 전형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 머물러 붙들립니다. 아담과 하와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그냥 ‘내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라고 표현을 합니다. 늘 이야기하지만 마치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터주대감 노릇하는 형상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무어라 고백을 하는가 하면 7:24에서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라 고백을 합니다. 교우여러분!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죄의 포로가 되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기독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롬8장에서 성령을 요청합니다. 여러분 성령을 요청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여러분 가운데 오게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내 안의 죄를 물리쳐야 하는데, 싸워 이겨야 하는데, 일단 전쟁이 나면 전쟁터는 폐허가 됩니다. 황폐해 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하고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그 결심이 무너지고 이전의 일을 또 합니다. 죄와 싸우려들면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6센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사실은 자기가 죽은 귀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영적 존재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5감에의해서 느낄 수 없는 영적 존재가 보이지 않지만 어느 집에서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내용의 영화가 종종 나옵니다. 영화는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인인데, 그 집에 또 다른 주인이 주인 행세를 하는 형국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상입니다. 허구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의지로, 힘으로 죄와 싸운다면 백전백패입니다. 사도 바울이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결국 ‘다른 법이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이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 내가 내 죄를 볼 때 그 죄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성령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총으로 초대 받아, 그 은혜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죄를 있는 그대로, 더 이상 나에게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일단 죄와 싸우려 하면 안됩니다. 죄는 죄 대로 그냥 놓아두어야 합니다. 마치 농사지을 때 피 농사 짓지 말고 벼 농사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를 뽑으려 하면 벼까지 같이 뽑히고 맙니다. 그러니 그냥 피는 그대로 놓아 두고 벼가 어떻게 잘 자랄지에 관심을 귀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는 마지막 추수 때 자연스럽게 주인에의해서 뽑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벼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까요? 밭의 작물들이 무슨 소리를 듣고 큰다고 하나요? 주인의 발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합니다. 벼도 역시 늘 새벽이면 찿아 와 물꼬를 터 주기도 하고 막아주기도 하는 주인의 손길에 의해서 자란다는 것입니다. 벼가 잘 자라는데 피가 대수인가요? 기우이지요. 그러니까 피를 보지 말고, 벼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종 말씀하지만 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잘 들을 둘 알아야 합니다.

밭에 자주 찿아오는 그 농부의 발걸음, 논의 물꼬를 트는 손길이란 바로사랑이지요. 성경은 이 사랑에대해 끊임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마지막 유언의 말을 하는 신명기서의 6장에서 소위 쉐마, 즉 ‘들으라’고 하면서 신6:5에서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
나님을 사랑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또 다른 사랑, 같지만 다른 사랑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마22:39-40에서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죄는 그냥 놓아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랑, 사랑 어떤 사랑이라요? 우리에게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는 죄를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을 다하여 교회를, 말씀을, 성도를 이웃을, 세상을, 원수를 사랑해야합니다. 사랑하지 않고 이 세상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랑입니다. 요15장 포도나무 비유의 9,10절 말씀을 보면 말씀 지킴의 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
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
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랑을 통해 우리는 내 안에 자리한 죄에 연연하지 않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주님 사랑의 삶 만이 나의 유일한 승리의 삶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닷가에 배를 타고 가는 중에 예수님이 바다를 걸어 오셨습니다. 유령인줄 알고 놀라하는 중에 예수님인 것을 안 제자 중 베드로가 나도 주님처럼 걷고 싶다고 하자,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배에서 나와 바다를 걸어갑니다. 그런데 한 두 걸음 걷다가 그만 바다의 풍랑을 보고 무서워 빠져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가와 손을 붙잡아 구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만을 보고 걸을 때에는 바다도 너끈히 걸을 수 있었지만, 풍랑을 보자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풍랑 넘어, 세상 넘어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손길 만을 바라며 따라갈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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