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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를 잃어서는 안됩니다(2012년 7월15일, 성령강림후일곱째주)

하늘기차 | 2012.07.15 15:37 | 조회 2193


사기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2012년 7월15일(성령강림후일곱째주) 삼상17:31-40

사울은 왕이 되기 전 키도 크고, 잘생겼지만 수즙음이 많은, 겸손한 청년이었습니다. 아버지 기스가 기르던 암나귀들 몇 마리를 찿으러 나갔다가 하나님의 종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는 이스라엘이 극구 하나님께 왕을 세우겠다고 외쳐되던 때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미스바 광장에 모이자, 사무엘이 제비를 뽑았는데, 베냐민 지파 중에 마드리집안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힙니다. 그 때 사울은 짐짝 뒤에 숨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자 마자 하나님 보다는 사람을 생각하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합니다. 잘 알겠지만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 전리품을 남기지 말라 하였는데, 전리품이란 전쟁에 나간 군사들이 용맹스럽게 싸워 승리 한 댓가로 얻는 것이어서 이스라엘은 이 전에는 생각하지 못하던 개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전쟁은 하나님이 승리케하시는 전쟁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전리품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아말렉과의 큰 전쟁을 치르고 나서 아말렉 소유의 양과 소를 아깝게 여겨 숨겨둡니다. 아마 수하 장군들이 욕심이 생겨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사울은 부하 장수들의 일들을 묵인해 준 것 같습니다. 삼상15:24에 보면 군인들이 두려워, 그러니까 부하 장수들이 두려워 그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심은 온대 간데 없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며 보여주었던 그 수즙음과 겸손은 그저 자기 연민이지 하나님 경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말라 할 때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일 만 생각한다고 역정을 내셨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두려워 하면서,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서 사울은 점점 이 전의 모습을 잃어갑니다. 사울이 처음 왕으로서 한 일은 암몬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때 사울은 전 이스라엘에 소집령을 내리고, 소 두 마리를 잡아 토막을 내며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않으면 이렇게 될 것 이라하며 용맹을 떨치던 사울인데, 지금 블레셋의 골리앗 앞에서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을 따랐으니 사람을 따라 좌지우지 합니다.

그런면에서 다윗은 어떠한가요? 다윗 역시 아버지의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찿아온 것도 형들에게 먹을 것과 옷 가지를 가져다 주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였습니다. 전쟁지역에 심부름 간다는 것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다윗은 늘 아버지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겸손하였습니다. 사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부터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다. 삼상16:14은 주님의 영이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그 치료를 위해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을 추천하는데, 바로 다윗을 추천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며 노래하기 위해 왕궁을 출입하게 됩니다. 사울이 악한 영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마다, 다윗이 찿아가 수금을 탓고, 그 때 마다 사울에게 내린 악한 영이 떠나고, 회복이 되곤 하던 때였습니다. 당시의 왕궁을, 그것도 왕 옆에서 수발을 든다면, 오늘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 소속일 텐데, 다윗에게는 그러한 특권 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겸손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고, 사무엘을 통해 새로운 왕을 뽑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사울왕을 위해 왕궁을 드나들 때, 다윗은 이미 사무엘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혀 그러한 오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 있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에대한 신뢰, 하나님에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대하여 마땅히 드려야할 것을 드리는 자세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이 세상을 사랑으로 품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에대한 그 분에대한 신뢰와 존중이 바로 경외요, 하나님 두려워 하는 마음입니다. 다윗과 사울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과 사람을 두려워 하는 것의 차이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말씀에 순종하여 형들을 위해 먹을 것과 의복을 챙겨서 전쟁터로 나갑니다. 마침 쌍방 간에 전열을 가다듬어 전투 개시의 함성을 외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진영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에 아군 진영이 혼비백산하며 달아납니다. 바로 골리앗입니다. 성경에 여섯 규빗 하고도 한 뼘이라고 하니 cm로 따지면 한 규빗이 40cm니까 키가 2m60cm이나 됩니다. 방패를 드는 사람을 앞에 세우고 등장합니다. 그 거인이 외칩니다. ‘나하고 맞장을 뜰 사람 나와서 싸워보자 너희가 보낸 사람이 이기면 우리 블레셋이 너희의 종노릇을 하고, 내가 이기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라’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이스라엘 진영의 모든 사람들이 그 말에 대꾸를 못합니다.

그 때 다윗이 한 마디 합니다. 삼상17: 26입니다.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받는 치
욕을 씻어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준다구요? 저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녀석이 무
엇이기에, 살아 계시는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입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견딜 수 없어합니다. 모두 침묵하고 있을 때 다윗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며 나가서 싸우려고 합니다. 이것을 소위 거룩한 분노라고 하나요?

얼마 전에 ‘스테판 에셀’이라는 옛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던 분이 기록한 ‘분노하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무관심에서 돌이키라 합니다. 93세의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외침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양극화, 자본에 휘둘리는 언론에대해, 특히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폭력에대해 비폭력으로 맞서는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바라보며 분노하라고 외치는 글을 읽었습니다.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비폭력을 택해야 한다고 하면서 압제자와 피압제자 양측이, 압제를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의 길을 찿아야만 하며, 그래야 더 이상의 테러리즘의 폭력이 발을 디딜 수 없게 된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증오가 쌓이면 협상과 대화는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무저항의 외침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 바로 오늘 이 시대에서는 물질로부터 오는 상업주의의 거대한 힘의 폭력에대한 분노에서부터 오는 비폭력의 저항인 것을 봅니다. 다윗이 분노하여 골리앗과 대항하겠다는 이야기가 사울에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부릅니다. 대견하기도 하고, 그러나 애잔한 마음으로 다윗을 바라봅니다. 그러자 다윗이 사울에게 말합니다. 32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저 자 때문에 사기를 잃어서
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
겠습니다” 골리앗 때문에 기를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줄 곳 전쟁에서 숫자나, 어떤 상대의 힘 때문에 전쟁에 패한 적이 없습니다. 사사시대에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과 싸울 때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의 군대의 수가 너무 많아 이대로 나가 싸워서 이기면 자기들이 힘이 세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 까 염려된다고 하면서 군사를 300명으로 줄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가 이러한 기운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 기운을 지금 다윗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에대한 경외입니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혹 여러분 앞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습니까? 앞에 안개가 끼여 보이지 않습니까? 바다의 풍랑처럼 큰 세상의 근심이 여러분을 덮칠 것 같습니까? 하나님 경외하는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기운을 빼앗길 번한 위기가 다가옵니다. 바로 큰 형 엘리압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가지고 온 먹을 것, 입을 것을 군수품 담당자에게 넘겨주고 형님들을 만나러 전선으로 향한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골리앗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고, 또 군인들이 골리앗을 물리치면 포상을 준다는 이야기도 듣고는 분노하여 골리앗과 싸우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큰 형 엘리압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28에 보면 형 엘리압이 화를 내며 꾸짖었다고 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군인들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맏형 엘리압이 듣고, 다
윗에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너는 어쩌자고 여기까지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도 안 되는 양은 누구에게 떠맡겨 놓았느냐?
이 건방지고 고집 센 녀석아, 네가 전쟁 구경을 하려고 내려온 것
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그러자 29에 보면 다윗이 형에게 대들었다고 합니다. 왜 형에게 대들었을까요? 엘리압이 다윗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몇 마리도 안되는 양이라는 말에 발끈했을 것입니다. 아마 다윗은
“그래 몇 마리도 안되는 양, 형이 키워봤어! 키워보았다면 그런 소리
가 나와! 그 몇 마리도 안되는 양을 위해 내가 목숨을 내어놓고 사
자나 곰과 싸운거 형이 몰라! 알면서 왜 그렇게 섭섭한 말을 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싸움이 계속 이어질 것 같은데, 거기 까지입니다. 29절에 보면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그런 다음에’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형하고 치고 받고 코피 터지게 싸운 것이 아니라, 다윗이 형에게서 몸을 돌렸다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다윗에게 문제있나요? 문제 없습니다. 다윗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욕을 당한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에게 몰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성정의 장사꾼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한 말이 있습니다. 요2:17입니다.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라는 시편 말씀입니다. 주님의 분노를 보고 제자들이 입으로 인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사람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진 것에 견딜 수 없어합니다. 주님의 열정이 다윗에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다윗이 형의 말참견에 자존심 상하여 싸움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존심 뿐 아니라 ‘건방지고 고집이 쎄다’고 했으니 보통 뿔이 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말에 너무 귀를 귀울이지 말기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람의 말에 분노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이 땅에 떨어지는 것에 분노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형제와 싸움을 벌인다면 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인가요? 승리는 골리앗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마음을 합해도 이길까 말까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을 힘들 게 한 것이 누구인가요? 전장터의 군인들인가요? 관리들인가요? 사울인가요? 가장 가까운 친 형 엘리압입니다. 여러분! 누가 가장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는가요? 가장 가까운 사람 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하고 먼 사람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아픔을 감당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몸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봅니다. 교우 여러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여간 그러면 다윗의 이 용기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요? 34-37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굽히지 않고 사울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의 종인 저
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
어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 저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그 놈을 쳐죽이
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 내곤 하였습니다. 그 짐승이 저에
게 덤벼들면, 그 턱수염을 붙잡고 때려 죽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으니, 저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도 그
꼴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자
를 어찌 그대로 두겠습니까?" 다윗은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
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님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그제서야 사울이 다
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렇다면, 나가도 좋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길 바란다” 이 말씀 어디서 들어보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딤전3:13입니다.
“집사의 직무를 잘 수행한 사람들은 좋은 지위를 얻게 되고, 그리
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믿음의 용기입니다. 믿음에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가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확신, 그러니까 하나님에대한 신뢰가 어디에서부터 올까요? 디모데서는 ‘직무를 잘 수행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34절 말씀에 보니 사울에게 말하는 중에 ‘임금의 종’이라고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합니다. 그 종이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 일상 속에서 사자와 싸우고, 곰에게서 빼앗긴 양을 다시 찿아 오곤 했는데, 그 맹수들이 달려들면 턱수염을 웅켜잡고는 때려 잡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책임을 감당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고백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자를 어찌 그대로 두겠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다윗이 다윗 될 수 있는 비결을 이야기 합니다.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골리앗과 싸우고자 하는 것은 자기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살려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믿음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오셨을 때에도 가장 많이 부르짖었던 것 중의 하나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대로 될지어다”였습니다. 이스라엘 곳곳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시키고자 고군 분투하였습니다. 오늘 성도들도, 교회도 상업주의에 빠져, 거세된 나귀처럼 믿음없이 그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 믿음 아닌 일을 즐기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야 사울도 마음에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사울이 하는 말을 귀담아야합니다. “그렇다면 나가도 좋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길 바란다”고 합니다. 왜 여기서 사울은 다윗과 함께하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할 것이라는 신앙을 고백하지 못할까요? 그렇습니다.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 보니, 그대로, 그 믿음대로 가는 것입니다. 사울은 싸움터로 나아가는 다윗이 안타까운지 불러 세워 자신의 전신갑주를 입힙니다. 그러나 다윗은 39절에서
“이런 무장에는 제가 익숙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무장을 한 채로는
걸어갈 수도 없습니다" 하고는 그것을 다 벗었다. 그렇게 무장을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울에게는 이 전신갑주가 자신의 생명줄인지 모르겠지만, 다윗에게 그 무장은 오히려 불편합니다. 익숙하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방법에는 익숙해 있으면서 하나님의 방법이 낯 설다면 어쩌란 말인가요?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익숙해 있나요?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구해줄 것이라 믿는 안전한 것을 다윗은 익숙하지 않다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편하고 안전하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요? 자녀들을 위해, 노후를 위해, 건강을 위해, 취직을 위해, 자신의 인맥관리를 위해 혈연, 학연, 지연에 끊임없이 연줄을 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제가 보더래도 우리 교인들은 그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목사님은 매일 세상에대해 부정적으로 말한다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는 그러한 정보와 관계를 통해 이러한 세상의 안전장치에 너무 익숙해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를 근본주의자나, 혹은 문자주의자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다윗은 이런 세속적 안전장치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기도에 익숙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익숙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교제가 아니라, 서로에게서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교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나눔의 일에 익숙하시기 바랍니다. 미움과 원망과 분노와 억울함과 어두움에 익숙하지 마시고 사랑과 용서, 관용, 희망, 그리고 벼랑 끝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찿아가는데 익숙해 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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