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희망을 설명하는 준비된 삶(성령강림후 다섯 번째주일, 2023년 7월 2일)
희망을 설명하는 준비된 삶
성령강림후 다섯 번째주일 벧전3:8-15;히4:15,16
지난 주 수요일에 TBC성서연구에서 함께 본 히브리서는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형식적인 율법과 제사의 유대종교로 다시 돌아가려 하거나, 박해로 신앙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권면의 글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첫 마디가 “이 마지막 날에”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주님이 곧 오실 급박한 종말을 바라보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같은 경우 사도 바울은 가능한 결혼하지 말라고도 합니다. 또한 종말인데 하며 일하지 않고 먹고 노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곧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신앙은 개념이나 가정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 교회의 종말은 2,000년이 지나 막연해 졌습니다. 초대교회의 긴장감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핍박 속에 살아남기 위해 모이기를 힘썼는데, 오늘의 성도들은 교회의 최소한의 예배에 무관심해 합니다. 곳곳에 교회요 집회, 세미나는 많아졌는데, 홍수 때에 물은 많지만 마실물이 없다고, 참 예배도, 그리고 그 예배를 간절히 사모하는 모습이 다 옛 이야기가 되는 것이 지금 우리 시대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 경기도 광주에 감리교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은 성도가 교회가 없우니 주일에 예배를 드리러 서울 정동 감리교회 까지 도시락을 2개 싸서 새벽 같이 집을 나와 가는 도중에 아침을 먹고,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점심을 먹고 감사와 감격으로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팩트였습니다. 신앙은 직장, 가정, 개닝의 사정, 국가·사회, 취미 등 여러 가지 중에 한 가지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신앙이 전부요. 삶 그 자체였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인가?” 이러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맞나? 지금 내 신앙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신앙인가? 주께서 교회에 함께하고 계시기는 한가? 저는 불연듯 이 질문을 종종 하였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말이 삶이였던 초대교회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인정하며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주님 다시 오실 종말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서 드러나는 긴박함과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게 지금의 우리 모습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며, 기도하며 성경을 읽습니다. 그럼에도 현재를 긍정하며 주님 안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초대 교회 때 역사하던 성령께서 여전히 지금의 교회 안에서도 역사하며 이 상황을 성령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확신이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직 아니지만, 그러나 곧 오실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벧전3:8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한 마음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교회의 교회됨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됨의 표출이기도 하니까요. 신약 성경에 기록된 교회공동체의 대 전제입니다. “한 마음을 품으라” 그리고 서로 동정하며, 사랑하고, 자비하며, 겸손하라 합니다. 그런데 와 닿지가 않습니다. 본문 말씀에 한참 머물러 있었지만, 감동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글 개역본을 찿아보았더니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라고 합니다. 휼은 ‘불쌍히 여기다’의 휼(恤) 입니다. 체는 몸 체(體)이구요. 그 순간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아!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몸입니다. 오늘 읽은 히4:15본문말씀 한글개역은 우리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어떻게 체휼하였나요. 빌2장은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히 생각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이 되어 죽기 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합니다. 체휼의 결국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에서부터 오나요 죽기까지 순종하였다고 합니다. 아! 순종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안에 생겨납니나. 교우 여러분 십자가는 자기 의가 아닙니다. 순종이 아니면 십자가일 수 없으며, 체휼이 아닙니다.
십자가, 죽기 까지하는 순종 앞에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 보다는 초대교회의 그 핍박의 급박함과 긴장감이 초대교회로 하여금 이 말씀을 체휼할 수 있도록 이끌지 않았나 십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로하여금 부담으로 다가오지 만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16절 말씀이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자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정신줄을 놓치말고 주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은 과거의 주님이거나 장차 언제 올지 모르는 주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 제때에 우리의 필요한 것을 체워주시며, 막힌 담을 헐으시며, 아픈 곳을 어루만져 회복시켜 주십니다. 제때에, 주님의 자녀들의 각 처지에 따라 꼭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우리에게 죄 없다고 선언하신 주님께 죄책감에 사로잡혀 어영부영하지 말고 담대하게 주님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아직 오지 않은 종말을 바라보며 지금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유효합니다. 벧전3:9은 누군가 나를 해롭게 하거나, 모욕하거나 할 때 어떻게 하나요? 성격이 온순한 사람은 그러려니 할 것입니다. 아니면 참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주고 받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도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패를 끼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복을 빌어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니 그렇게 순종하여 성령의 감동을 쫓아 우리의 입술로 복을 빕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15절은 더 나아가 주님을 마음 속에 모시는 축복으로부터 오는 희망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왜 기독인들이 핍박 속에서도 가슴 벅찬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궁굼해 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에서 초대교인들이 그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얼마나 여유 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는지가 느껴졌습니다. 그게 바로 복이 아니겠습니까? 초대교회 당시 세상은 종과 주인이, 남여가 차별이 없이 한 자리에서 함께 포도주와 떡을 나누는 그 모습을 당연히 궁굼해 했을텐데, 설명할 수 있도록 마음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얼마나 풍요롭고, 여유로운가요. 오늘 급하게 돌아가는 각자 도생하는 숨 가쁜 삶 속에서, 자기 문제 하나로도 힘든 삶을 이어가는데, 왜 교회는 가슴벅찬 희망으로 즐거웁고 감사한지 설명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초대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설명할 준비가 되어있나요? 자존감입니다.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가슴벅찬 십자가의 희망을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을 해도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10, 11절의 앞 부분을 보겠습니다. 무어라고 하나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평화를 추구하며, 좇는”사람들인데, 12절에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 복있는 사람, 즉 의인들을 굽어 보신다, 즉 얼핏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살펴 보신다고 합니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왜 복있는 사람들인가 하니 주님께서 일일이 세밀하게 살펴주십니다. 아! 조금 전에 나눈 히브리서 4:16절 말씀 “제 때에 주시는 도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며 동행하십니다.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벅찬 희망과 감사로 교회의 풍성한 은혜를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복되고도 여유로운 삶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