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스스로 하나님 떠난 사울(어린이/부할5번째주일, 2023년5월7일)
스스로 하나님 떠난 사울
부활절다섯번째주일 삼상16:14-23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의 생각을 앞세울 때 가장 쉽게 자신을 정당화 시키는 장면은 공교롭게도 모두 제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처음 사건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포위하자 백성들은 굴이나 숲, 바위 틈에 기어들어가 숨고, 군인들은 모두 떨고 있는데 약속한 사무엘은 오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사울은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가지고 오라 하여 자신이 직접 번제를 올립니다. 사실 사무엘은 정확한 시간에 약속 장소에 왔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전쟁에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과의 약속인데 사울이 직접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이 후에 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데 아말렉과 싸워 승리하면 그들에게 딸린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군인들에게 전쟁에 나가 승리 하면, 그 점령지의 소유를 승리한 군사들이 나누는 것이 관례인데 주님은 모두 진멸하라 합니다. 왜냐하면 삼상17:47에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에 “전쟁의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라고 고백을 했듯이 하나님 백성의 전쟁은 하나님이 싸우시며,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아니 믿는 사람에게 모든 것은 하나님 소유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소유, 주권은 어디에 있나요? 주인에게 속하면 평화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싸워 승리하였는데, 삼상15:9은 그냥 군대라 하지 않고, 사울과 그의 군대는 가축들 중에 기름진 것은 남겨두고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 만 골라 진멸하였다고 합니다. 사울이 전리품 나눠 갖는 일에 동의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 양떼의 소리와 내가 듣는 소 떼의 소리는 무엇이냐고 묻자, 사울은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가장 좋은 것들을 끌고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아말렉과 싸울 때의 하나님의 명령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두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진멸하라는 명령은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렸던 신7:1-4명령입니다. 우상 숭배로 가득한 땅으로 들어가 정착해야할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에 빠질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위해 진멸하라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신6:25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충실히 지키면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될 것”이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없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인정을 받은 사람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말씀을 지키는 것인데, 예수님은 이것을 포도나무 이야기에서 사랑이라고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무나 법이 아니라 사랑이며, 그 사랑은 무엇을 하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였듯이 아버지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우리 역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은 의무나 의지가 아니라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제사를 위해 남겨둔 가축들의 울음소리라고 변명하자, 역정을 내면서 순종이 제사 보다 나으며,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 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울이 군인들이 두려워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였다고 하며 내가 명령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죄를 고백하는 것 같은데, 내용은 변명입니다. 하나님 두려워하기 보다 사람을 두려워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어긴 이유를 군인들에게 돌립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은 군인들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사울인데 말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말이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고 다윗은 시51:17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깨어진 마음입니다. 깨어지고 짓밟힌 심
령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은 말로만 회개하는 사울에게서 돌아섭니다. 사울이 사무엘의 옷 자락을 잡자 옷이 찢어지는데, 사무엘은 찢어지는 옷자락을 보며 하나님은 그렇게 찢어지는 옷 자락처럼 이 나라를 빼앗아 더 나은 사람에게 주셨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울이 이스라엘과 장로들 앞에서 제발 체면을 세워달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군인들이 두렵다고 하였는데, 이미 사울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오늘 말씀에 사울에게서 주님의 영이 떠났다고 하는데, 사울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떠난 마음이 사람에게 향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며 그러니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사, 제물로 변명을 합니다. 지난 주 수요 TBC 성경연구 로마서 롬1:17에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이 때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공동 번역은 ‘하나님과의 옳바른 관계’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참 의미 있는 좋은 해석이라 생각했습니다. 복음,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예수와 그리스도에대하여 전혀 다른 두 세계가 부딪히며, 하늘과 땅이 만나는데, 두 세계가 맞 닿은 순간, 이 세상의 역사, 시간, 실제는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기를 그치게 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에 들어가는 세상이 됩니다. 역설입니다. 그 순간 시간은 종말. 역사의 종말이 시작됩니다. 인간 시계의 세상은 멈춥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가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순간 위로부터 세상을 깨고 들어오며 세상질서는 멈추어지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치가 0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주 이 신비로운 예배에 초청되어 구원의 은총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과의 이 복된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이 구원의 신비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우리는 사울 왕의 모습처럼 사람에게 매이며, 세상에 붙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언제부터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나요. 사무엘은 사울에게 처음에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15:17에서 스스로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보시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어른이 되게하셨다고 하는데, 그 마음, 그 자기 낮춤의 마음이 어디서 망가지기 시작하였나요? 역시 사람이요, 생각입니다. 블레셋이 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 하면서 변명을 하는데 제사를 드렸다고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당시의 최고의 군사 국가인 블레셋, 즉 사람과 자기 생각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두려워하는 모습에 자기 변명이 뒤 섞여 자기를 정당화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로 향합니다.
사울에게서 주님의 영이 떠났고, 그 대신에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힙니다. 왜 주님의 영이 떠났을까요? 하나님께서 처음 사울을 왕으로 정할때의 사울은 겸손했으며(9:21), 마음이 새로웠고(10:9), 훌륭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10:26) 또한 기름부음을 받으며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자의 자리에 함께 하며 예언을 하기도 할 정도로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식하며, 두려워하며 하나님에게 받은 영적 감흥에 익숙하기 보다는 생각에 머물며 사울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놓치고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불경과 불법에 매입니다.
롬1:17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생명의 대 전제는 18절에서 바로 하나님의 진노로 대치됩니다. 저는 이 말씀의 전환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가 동전의 양면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불경, 불의로 말미암아 진노로 나타납니다. 이중적이며, 그래서 종말, 심판을 그 자체로 품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예수와 그리스도, 생명과 죽음의 역설, 즉 하나님의 의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역설을 철저히 인식하여 하나님의 사랑, 선함, 의, 생명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발적이며 자유롭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과 인간, 죽음과 생명이 하나입니다. 구원의 신비요, 생명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세상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계속 세상 가치와 관계에 머물며,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구별된 삶을 복되다고 합니다. 지금 이렇게 예배드리는 시간이 구별되는 시간입니다. 구별되야 세상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하나님의 풍요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그 구별된 마음을 받으시고 생명, 사랑, 감사, 평화, 기쁨으로 돌려드립니다. 진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늘 사울왕처럼 사람과 종교와 생각을 뒤 섞어 세상, 사람 눈치 보며 세상의 풍요를 마치 하나님의 복인양, 세상의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좋을대로 신앙을 합리화 하며 종교생활에 묻혀있는 것은 아닌지요? 사울처럼 하나님 이름 부르면서 거짓 회개하며 사실은 자기 생각에 철저하게 매여 허구적인 종교생활에 자기 스스로 위로의 최면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가요? 지금 이렇게 예배드리는 자리야 말로 역설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가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거룩한 영의 감동이냐, 인간의 생각이냐로 생명의 역사는 나뉘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역설입니다. 그러니 생각, 경험, 합리성을 넘어 사도 바울이 롬8장에서 성령을 요청하듯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마지막 포도나무 비유를 들려준 다음에 성령을 약속 했듯이,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하며 성령을 기다리라 했듯이 우리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령, 거룩한 영, 창조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구하며 생명의 구원을 얻기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