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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아브라함, 사람의 아들(종려주일, 2020년4월5일)

하늘기차 | 2020.04.04 19:02 | 조회 870




                 침묵, 아브라함, 사람의 아들

종려주일(2020329)                                                                           11:1-11

   아브라함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 모리아산으로 향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됩니다. 아브라함이 마지막 순간에 이삭을 향한 칼을 거둔다면, 아니면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삭의 목을 찌른다면, 하나님이 그동안 수많은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 속에 함께하며 잘했다 잘했다 하며 인정하고 키워 온 믿음과 약속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아브라함 역시 이정도면 되겠지 하며 이삭의 목에 예리하게 들이 댄 칼날이 이삭의 목 옆을 슬며시 비켜 간다면, 아니면 바라지 않았던 상황인데, 정말 이삭이 아브라함의 칼에 생명을 잃는다면 25년 기다림이 물거품이 됩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한 치의 양보없이 팽팽하게 서로를 신뢰하며 명령과 약속의 역설을 밀고 댕기며 모리아 산에 당도하였고, 준비된 산양 한 마리로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마무리 됩니다. 이 고조된 긴장감을 풀 수 있었던 것은 침묵입니다. 믿음입니다.

아마 여기서 아브라함이 말을 하였다면, 약속과 명령을 벗어나 수 많은 상상력과 자기연민과 불안으로 약속과 명령의 긴장감은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야웨 하나님께서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여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리 까지입니다. 그곳이 바로 사랑이, 진리가, 평화가, 생명이 머무는 곳입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은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 역시 침묵 속에서 아버지의 포박, 재단에 자기를 올려 놓는 전 과정을 받아들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노인네여서 이삭이 마음 만 먹었으면 아버지의 포박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었고, 아버지 아브라함의 어설픈 포박을 풀고, 흔들리며 내려치는 칼날을 어렵지 않게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든 과정을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침묵이었고, 믿음이었습니다.

    그 침묵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의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배반하려는 유다의 마음을 읽으시고 유다에게 한 말씀 할 수도 있으셨지만 끝끝내 침묵하셨습니다. 말을 하면 나늬어 지지만 말하지 않고 침묵하면 끝끝내 결국 상대방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침묵은 내 안의 미움과 원망과 불안과 거짓을 더 이상 확대 재생산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의 미움이 하나 그대로 남아 있으며, 하나의 원망이, 하나의 거짓이 하나 그대로 있다가, 그리고는 사그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미움을, 원망을, 불안을 말하면, 이제 둘이 되고, 넷이 됩니다. 그러나 침묵은 그 모든 것을 사람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돌립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유다 앞에서 제자들 앞에서 침묵하셨고, 빌라도와 헤롯과 무리와 군병들과 모든 사람들 앞에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섞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섞이지 않으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조화롭다는 것은 혼합되어 뒤 섞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 하나 하나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인정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침묵 속에 자기 발현을 뽐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침묵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침묵에 익숙해 지면 좋겠습니다. 우주의 언어는 침묵입니다. 대기권 넘어에는 아무 소리도 없습니다. 말과 말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는 모두 침묵입니다. 말과 소리가 이 지구를 뒤 덮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침묵입니다. 우주와 시간은 침묵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조화합니다. 하늘의 새들, 집 안의 강아지, 꿀벌과 나비들, 바닷 속의 물고기, 나무와 꽃들, 바다와 강과 산은 침묵합니다. 우리가 침묵하지 못하니, 자연이 발하는 침묵의 메시지를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소리와 뜻을 듣지도 헤아리지도 못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19의 발현은 지구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존재 양식과 가치 체계를 멈추게 하였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 온 인간에게 멈추어서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라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19가 전염성과 치사율이 높다고 하지만 치사율로 따지면 지속적으로 모든 생명체에 죽음을 가져다 준 것은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인류의 치사율, 전염성은 이제 지구 전체의 존재를 위협하는 지경입니다. 그런면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생명있는 것들의 죽음, 돌연한 죽음, 이유 없는 죽음, 미쳐 태어나지도 못한 죽음, 원통한 죽음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6:5은 십자가와 부활 이후의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굳이 죽임당한 것 같은 어린양으로 불러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치욕스러운 모습이 보입니다. 감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은 이 죽음이 풀이되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생명을 위해 무수히 많은 생명이 생명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존엄한 창조 질서요 섭리입니다. 그러니 죽임당하였다는 것, 생명이 죽음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겸허히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여 침묵을 보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그 소란스러움에 성 안의 사람들은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향하여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환전상들을 몰아내셨습니다. 다음날 유대인들이 당신이 무슨 권한을 가지고 성전에서 그렇게 했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슨 권한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묻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자기 정체성에 확고히 서 있는 분이지 무슨 권위를 내세우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대해 끊임없이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는 오히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라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프레임을 쒸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욕망을 받아들이지 않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매 달았습니다. 이 프레임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나아갔을 때 부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하며 몰아 부쳤습니다. 52어의 기적에서도,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도, 그리고 십자가에서도 사람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 와 보아라고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님이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이 세상 나라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계십니다. 하나님나라의 열정으로 세상의 정치와 종교와 문화와 사회와 경제의 힘 앞에 자유한 참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의 논리, 즉 말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서 계십니다. 그러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세워집니다. 겉으로는 세상 법정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 의 법정 앞에 인류를 세운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침묵으로 온 우주와 역사를 품고 사람의 아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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