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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차 해고자의 일상(퍼오기)

하늘기차 | 2014.11.11 17:48 | 조회 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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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압 때 맞아 하반신 마비된 쌍차 해고자의 일상
        

그날,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의 도장공장 지붕에서 그는 경찰에 둘러싸여 흠씬 두들겨 맞았다. 2번을 까무러친 끝에 경찰에 끌려나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안성경찰서로 가는 호송차 안이었다. 다음날인 2009년 8월6일, 76일간의 파업은 끝났지만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한 해고 노동자의 삶도 거기에서 멈췄다. 구속과 석방, 그리고 4~5차례의 자살 기도와 5번의 또다른 해고 끝에 용접공으로 살아남은 그는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살을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반쯤은 미친다’고 했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일하다 2009년 해고된 최성국씨가 8일 저녁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는 경기도 화성시의 한 공장 구석에 앉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하루 10시간씩 용접일을 하고 있는 최씨는 다시 쌍용차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쌍용차 노조가 사쪽의 ‘2646명(전체 노동자는 7135명) 정리해고’ 통보에 맞서 파업에 나선 것은 2009년 5월21일이었다. 11일이면 “딱 죽기 전까지의 고통”이던 해고의 쓰라린 아픔도 2000일째가 된다. 20대에 공장에 들어와 ‘뼈빠지게’ 일하다 30대 후반을 지옥 같은 파업현장에서 보내고 이제는 겉늙은 40대가 되어 경기 화성의 한 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 최성국(44)씨를 9일 만났다.

“억울했다. 누구는 조퇴다 병가다 빠져도 고과점수 잘 받아 살아남고, 아파도 병원 한 번 안 가고 365일 일한 나는 해고됐다.” 회사를 외국 업체에 팔려고 경영난을 부풀리고 눈엣가시 같은 노조를 없애려 한다는 이야기가 돌던 2009년 5월, 평범한 조합원이던 그는 15년 다닌 공장에서 잘렸다.

파업 75일째인 8월5일 아침 7시40분께 그는 “올 것이 왔다”고 예감했다. 새벽부터 공장 위를 날던 경찰 헬리콥터가 최루액을 뿜더니 용역과 경찰이 진압에 나섰다. 조립3팀 ‘동생들’을 피신시키다 경찰 곤봉에 맞아 쓰러진 그에게 발길질과 몽둥이찜질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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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최성국씨가 8일 저녁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한 공장에서 용접을 하고 있다. 최씨는 이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늘이 쑤시는 고통이 있어 서있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일을 하면서 이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파업은 끝났지만 그의 하반신은 마비됐다. ‘끔찍한 고통’의 시작이었다. 병원 치료 도중 2009년 10월7일 환자복 차림의 그는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됐다. 아내는 “치료라도 해주고 구속시키라”며 경찰서 앞에서 대성통곡했다.

평택구치소에 수감된 뒤 그는 기어서 화장실을 오갔고, 파키스탄 이주 노동자의 등에 업혀 운동시간에 햇볕을 쬘 수 있었다. 같은 해 12월4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그는 병원을 찾아 전국을 다녔다. 그러나 공황장애 등을 이유로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은 것이 전부였다. 마비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더 심해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어렵사리 마련한 13평 아파트도 병치레 비용으로 날렸고 아내는 생활전선에 나섰다. 훤칠한 키에 운동을 좋아해 몸이 다부졌던 최씨는 해고 이후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새벽 병실을 순회하던 간호사에게 달려든 일도 있었다. “새벽에 공장에 들이닥친 경찰과 용역 깡패인 줄 알았지…”라고 했다. 며칠치 신경안정제를 모았다 한 번에 털어 먹고 병원 화장실에서 쓰러져 발견되기를 4~5차례. 뛰어내리려 병원 옥상에 올라간 적도 있었다. 결국 그는 치료를 포기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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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최성국씨가 8일 밤 경기도 평택시 본인의 집에 도착해 잠들어있는 딸 최솔비양을 안아 침실에 눕히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고 있다.

“안방 벽에 기대어 있는데 아이들과 집사람 속옷에 구멍이 난 게 보였어요. 사줄 수도 없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그러던 2011년 2월, 동료들한테 연락이 왔다. “ㅇ형이 죽었어.” 한 살 위의 ㅇ씨와는 공장에서 야근을 끝내고 소주잔을 기울이던 사이였다. 말수는 적었으나 다감했던 ㅇ씨는 파업 뒤 아내가 자살하자 통장 잔고 4만원을 남긴 채 목숨을 끊었다.

“형이 죽은 게 내가 죽은 것과 같다”던 그는 3일 내내 장례식장에서 울며 술을 먹었다. 2011년 당시 숨진 해고 노동자와 가족만도 14명에 이르렀다. “아, 이래서 가족이 무너지는구나”라고 절망하던 그에게 어린 딸(7)과 아들(9)이 다가왔다. “아빠 힘내세요. 아프지 말아요.” 어린 딸이 최씨의 눈물을 닦아줬고, 그는 악착같이 재활에 나섰다.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뒤 취업전선에 나섰지만 세상은 차갑기만 했다. 방역기 공장 등에 취직해 3개월 일하고 정식 직원이 되려고 입사서류를 낼 때마다 퇴짜였다. 젊은 손길이 아쉬워 반기던 회사들도 ‘쌍용차 해고자’라는 것을 알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섰다. ‘죄송하네요’ ‘됐습니다’ ‘출근하지 마세요’…. 최씨는 “욕 안 먹은 것만도 다행이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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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최성국씨가 9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집에서 피곤해 하며 딸 최솔비양 옆에 누워있다. 최씨는 전날 통증으로 밤을 지샜다.

5년 사이 정권도 바뀌었지만 나아진 것은 없다.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대규모 정리해고가 이뤄졌고,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정조사를 약속했지만 ‘말’뿐이었다. 최씨는 일이 힘들어 사람 구하기 어렵고 월급이 박하지만 잘릴 가능성이 적은 ‘철일’(용접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지난 2월7일 서울고법이 쌍용차 해고자들이 낸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는 “기쁘기보다는 슬펐다”고 털어놨다. 파업이 잘못이 아니라니 고맙지만, “그간의 세월이 너무나 혹독했기 때문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파업 이후 2000일,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최씨는 감회가 엇갈리는 듯했다. “또 하라면 정말 파업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식들을 노예로 살게 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

하루 10시간 용접일에 매달리는 최씨의 복직은 이젠 가족의 소원이기도 하다. “공장으로 돌아가 동료들하고 잘 지내고 싶고, 월급 받아서 아이들에게 새 컴퓨터도 사주고 싶어요.” 쌍용차 노동자들의 해고무효확인 소송 상고심은 오는 13일 열린다. 2000일을 돌아 6번째 맞는 겨울, 그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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