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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야 굴뚝에서 내려왔다

하늘기차 | 2017.02.06 12:03 | 조회 724


하늘 노동자의 몸이 무너지고 마음이 부러지는 사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2월1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18명이 복직한 지 만 1년이 됐다. 복직 11개월 전(2015년 3월) 교섭의 물꼬를 튼 굴뚝농성이 끝났다. 같이 굴뚝에 올랐다가 따로 내려온 두 해고자는 복직을 두고도 다른 길을 걸었다. 김정욱(왼쪽)은 복직하지 않았고, 이창근은 복직을 택했다. 12일 간격으로 굴뚝에서 내려온 그들은 지난 2년 동안 둘이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굴뚝의 상흔은 시간의 길이만큼 길게 파였다. 지난 1월26일 굴뚝이 올려다보이는 곳에서 농성 해제 뒤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섰다. 2년 전 그들의 굴뚝을 지키며 동료들이 지원 천막을 쳤던 자리였다. 89일 동안 굴뚝에 같이 매달렸던 김정욱과 이창근은 서로에게 시선을 맞추는 것을 힘들어했다. 이 글은 굴뚝 이후 두 사람의 첫 대화이자 둘이서 함께 하는 첫 언론 인터뷰다. 그들이 굴뚝 위아래에서 겪었던 각자의 지옥과, 복직을 둘러싼 각자의 선택과, 그 선택으로 살아온 지난 1년을 이야기했다. 해고노동자가 복직한 지난 1년은 2009년 정리해고 이후 사망자(복직 전까지 28명)가 발생하지 않은 유일한 해였다.<한겨레>는 고려대 김승섭 교수(보건정책관리학부)의 도움을 받아 복직자 18명 전원의 건강상태도 조사했다. 2015년 그들(당시 해고자 신분)이 동일한 설문에 답한 내용과 비교 분석해 변화를 추적했다. 무엇이 노동자를 죽이고 살리는지 명확하게 확인됐다. 글 이문영 기자 

                      우리는 이제야 굴뚝에서 내려왔다
                     이창근의 고백 김정욱의 귀향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 1년
‘굴뚝 동지’ 2년 만의 첫 대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복직을 위해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옥쇄파업, 삭발, 단식, 노숙농성, 오체투지…. 고공농성만 세 차례 했습니다. 세 번째 하늘에 매달린 김정욱·이창근의 굴뚝농성이 대주주를 움직여 교섭을 열었습니다. 농성이 해제된 뒤 ‘굴뚝 동지’는 서로를 만나지 않고 살았습니다. 퇴로 없는 하늘 노동자들은 자신과 동료를 갉아먹으며 하늘을 버팁니다. 지난 1년 동안 한 명은 공장으로 돌아가 일했고, 한 명은 고향으로 내려가 새 길을 모색했습니다. 굴뚝과 다를 것 없는 땅에서 2년 만에 마주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서는 것이 힘든 일들이 있다.
하늘 벼랑에 매달려서가 아니라 착륙하는 길이 닫혀 고공의 노동자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다. 함께, 올랐으나 따로, 내려온 굴뚝을 바라보며 두 남자가 함께, 섰다. 12일 차이로 내려왔지만 나란히 서는 데는 2년이 걸렸다.

굴뚝 해제 뒤 처음 마주한 두 남자

지난 1월26일 김정욱(46)이 이창근(44)의 퇴근을 기다렸다.

정오 무렵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정문 안팎에선 두 개의 악수가 오갔다. 설 연휴 단축근무를 마친 노동자들이 쌍용차노조(기업노조)의 배웅을 받고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의 손을 잡았다. 김득중 지부장과 집행부가 공장을 나오는 동료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10여m 떨어진 곳에서 김정욱이 정문 안팎의 ‘근하신년’을 지켜봤다. 그가 정문 앞까지 오는 데도 1년이 필요했다. 2015년 말까진 그(당시 사무국장)도 지부장 옆에서 명절 인사를 했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멀리서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고향 내려가 있다며?”

2009년 파업으로 정직을 당한 뒤 2013년 복직한 선배가 김정욱의 안부를 물었다.

“몸은 괜찮아?… 너만 보면 마음이 무겁다…. 전화번호는 그대로야?… 전화할게.”

김정욱은 전날 전남 곡성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평택으로 올라왔다. 평택에선 아내와 남매가 설 쇠러 오는 남편과 아빠를 기다렸다. 그는 평택에 도착하자마자 기차를 타고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광화문에선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국가의 손해배상 소송 철회를 촉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같이 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그는 광장에 두고 왔다.

오후 1시가 못 돼 이창근이 정문 밖으로 나왔다. 흰 머리카락이 부쩍 눈에 띄었다. 면도를 하지 않아 거칠한 얼굴엔 예전보다 살이 붙었다. 1년 전 복직(2016년 2월1일)한 그는 티볼리와 코란도C를 제작하는 조립1팀 섀시과 소속이었다.

2014~2015년 70m 굴뚝에 함께 올랐던 이창근(당시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 오른쪽)과 김정욱(당시 사무국장)이 지난 1월26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앞 식당에서 술잔을 나누고 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4~2015년 70m 굴뚝에 함께 올랐던 이창근(당시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 오른쪽)과 김정욱(당시 사무국장)이 지난 1월26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앞 식당에서 술잔을 나누고 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주강이 훈련해?”

김정욱이 이창근과 눈인사를 했다. 이창근의 아들 주강(11)은 남해에서 동계훈련을 마치고 전날 돌아왔다.

“리틀야구팀 선수야. 자기 학년 중에서 제일 커. 62㎏.”

야구는 아빠가 좋아했고, 아들은 축구를 즐겼었다. 굴뚝의 아빠에게 “빨리 내려와서 축구 하자”던 주강이 언젠가부터 포수 글러브를 잡았다.

“축구 할 때도 골키퍼를 하더니. 그런 거를 좋아하더라고. 지키는 거.”

어린 아들에게도 지키고 싶은 무엇이 있었을 것이었다. 이창근이 담뱃불을 붙였다.

굴뚝은 여전했고, 여전하지 않았다. 김정욱·이창근이 머물렀던 때처럼 굴뚝 연기(LNG가스)가 하얗게 피어 바람 방향으로 꺾였다. 그들을 굴뚝으로 이끈 사다리는 하단이 무른 무처럼 잘려나갔다. 오르내리는 것이 목적인 사다리가 오르내리는 기능이 제거(2015년 3월23일 이창근의 농성 해제 직후 회사가 절단)된 모습으로 굴뚝에 붙어 있었다. 쓸모가 없어진 채로 존재하는 사다리는 굴뚝농성의 흉터를 전시하는 것으로서 오직 쓸모있었다.

그들은 여전했고, 여전하지 않았다. 고공농성 해제(2015년 3월11일) 두 달 뒤부터 김정욱은 굴뚝이 보이는 담장 앞(공장 밖 굴뚝농성 지원 천막 자리)을 찾았다. “그 시간을 되돌아봄으로써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했을 때” 그는 혼자 굴뚝에 갔다. 이창근은 철조망 안으로 복직(2016년 2월1일)한 직후 굴뚝 밑을 오갔다. “굴뚝 아래서 홀로 서성이는 걸 사람들이 보면 좀 그러니까” 아껴서 갔다. 2년 동안 따로, 굴뚝을 봤던 그들은 2년 만에 함께, 굴뚝을 보면서도, 서로의 눈에 비친 굴뚝을 어려워했다. 2년은 시간으로 환산된 두 사람 사이의 거리였다.

설 연휴 전날인 1월26일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오른쪽 셋째)과 집행부가 평택공장 정문 앞에서 단축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노동자들에게 명절 인사를 하고 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설 연휴 전날인 1월26일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오른쪽 셋째)과 집행부가 평택공장 정문 앞에서 단축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노동자들에게 명절 인사를 하고 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복직해서 공장에서 맞는 명절은 어떻던가요?

이창근 “정문으로 걸어오면서 퇴근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봤어요. 2009년 8월 경찰에 옥쇄파업이 진압됐을 때가 떠올랐어요. 웬일인지 짐 보따리 싸들고 줄지어 연행되던 우리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어요. 복직 초기엔 감상에 자주 빠졌어요. 공장 처마를 쳐다보거나 작업 라인을 보고 있으면 불쑥불쑥 그랬어요.”

-복직한 동료들이 공장에서 퇴근하는 모습을 보는 느낌은요?

김정욱 “아직 복직하지 못한 분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며칠 전, 쌍용차를 두고 제가 ‘우리 회사’란 표현을 쓰더라고요. 8년 가까이 떠나 있었는데도 나는 아직 ‘우리 회사’라고 하는구나, 회사도 나를 그렇게 인정할까, 생각해봤어요.”

쌍용차 교섭 물꼬 튼 굴뚝농성
같이 올라 따로 내려온 두 사람
‘굴뚝에서 있었던 일’로
깊은 상흔 남은 김정욱·이창근
농성 해제 2년 만에 마음 터놔

그간 말하지 못했던 그의 지옥을
이창근이 처음으로 고백했다
“빨리 끝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몸과 마음에 문제 생겼단 사실
굴뚝에 있을 땐 알아채지 못했다”

2014년 12월13일부터 두 사람은 70m 굴뚝에서 같이 살았다. 그들의 고공농성은 쌍용차 대주주 마힌드라(인도 마힌드라그룹 회장)를 움직여 복직 교섭의 물꼬를 텄다. 정리해고가 ‘인간을 부수는 재난’임을 알리며 굴뚝은 사태 해결을 압박하는 사회적 지지를 모아냈다.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두 사람도 다쳤다. 극적으로 시작된 교섭이 시간을 끌면서 하늘도 땅도 자기 고름을 삼키며 버텼다. 김정욱이 89일 만에 굴뚝에서 먼저 내려왔다. 101일째 날 이창근(당시 지부 정책기획실장)이 땅을 밟았다. 노-노-사 합의안이 나오는 데는 9개월(2015년 12월)이 더 걸렸다. 땅에 도착한 뒤부터 김정욱은 이창근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입원 치료한 병원도 달랐다. ‘굴뚝에서 있었던 일들’이 후문을 낳고 소문으로 퍼졌다. 집행부 복귀 뒤 회의 자리에서 만났지만 따로 얼굴을 맞대진 않았다. 술자리에 앉은 것도 지난해 12월 형사재판(굴뚝농성 건)을 받은 6명 속에 섞여서였다.

‘와락’(평택시 통복동.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 심리치유센터)도 설을 앞두고 사람 없이 조용했다. 김정욱과 이창근은 와락에서 올려준 밥의 온기로 굴뚝을 버텼다. 와락 식탁에 그들이 마주 앉았다. 두 사람만의 만남은 굴뚝에서 내려오고 처음이었다. 함께 하는 언론 인터뷰도 처음이었다. 마음을 꺼내고 털어내기까지 그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기다려온 사람들에게, 처음을 맞을 ‘오랜 멈춤’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지난 1월26일 설 연휴 단축근무를 마치고 나온 이창근(왼쪽)이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정욱과 악수하고 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월26일 설 연휴 단축근무를 마치고 나온 이창근(왼쪽)이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정욱과 악수하고 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굴뚝에서 내 머리와 전쟁을 치렀다”

-연극 <김정욱들>은 보셨어요?

김정욱 “연극 소식을 듣고 가장 걱정됐던 게 ‘창근씨가 어떻게 생각할까’였어요. 지부 동료들의 반응도 걱정됐고요. 제목이 주는 부담도 있었어요. 대본으로 봤을 땐 굴뚝 위의 두 남자가 저와 창근씨인 줄 알았는데 연극을 보니까 둘 다 저였어요. 김정욱과 김정욱의 대화에서 감추고 싶었던 저의 모습이 보였어요. 세 번쯤 봤던 것 같아요.”

농성 종료 석 달 뒤 김정욱은 이창근 없이 <한겨레>와 인터뷰했다. 굴뚝의 상흔(2015년 6월13일 토요판 커버스토리 ‘나는 굴뚝 위에서 망가졌다…비참하게 내려왔다’)을 숨 고르고 단어를 고르며 전했다. 극단 차이무가 인터뷰를 각색해 연극으로 만들었다.

-왜 ‘이창근들’은 아니었을까요?

이창근 “한국 사회에서 해고자가 익명화돼 있잖아요. 우리를 관습적으로 소비하는 이미지가 있어요. 그래서 실명 제목은 좋았어요. 이창근도 김정욱들일 테니까요. 연극은 일부러 안 봤어요. (김정욱 “나도 연락을 못 했네.”) 기사가 나간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땐 기자한테 화를 내기도 했어요. 모두가 저를 공격한다고 느낄 때였거든요. 기사도 그 일환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요. 그땐 그런 망상에 갇혀 있었어요. 찬찬히 읽어본 뒤엔 고민하며 썼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고맙기도 했고요.”

-어떤 망상이었나요?

이창근 “‘우리에겐 인격이 없다’는 말을 제가 자주 했어요. ‘싸움에서 이기려면 결정적 국면을 여는 데 우리를 도구로 써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그 생각이 제 의식을 지배했어요. 과정은 사소하게 여겨도 된다는 알리바이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거예요. 제가 정욱이 형이나 굴뚝 아래 동지들에게 한 폭언들도 그렇게 합리화했던 것 같아요. 많이 거칠었어요. 땅에 내려온 뒤에도 한동안 그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요.”

지옥이 지옥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은 지옥 같았다. 정리해고 뒤 쉴 새 없이 동료들이 죽어나갔다. 두 사람이 굴뚝에 오른 날 26번째 죽음이 발생했다. 한 달이 됐을 땐 27번째 사망(2015년 1월14일) 소식이 굴뚝으로 올라왔다. 굴뚝 위아래에서 세 개의 지옥이 펼쳐졌다. 이창근과, 김정욱과, 그들을 지켜보는 땅의 동료들이 각자의 지옥을 살았다. 서로의 지옥이 서로의 지옥에 물 줘 서로의 지옥을 키웠다. 지난 2년간 말하지 못했던 그의 지옥을 이창근이 처음 고백했다. 이창근의 종이컵이 빌 때마다 김정욱이 조용히 물을 채웠다.

이창근 “제 몸과 마음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굴뚝에 있을 땐 잘 알아채지 못했어요. 희한하게도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어요. 시작과 끝이 하나로 꿰이는 거예요. 땅에서 쓰던 칼럼을 굴뚝에서도 썼어요. 태블릿피시로 쓰다가 배터리가 나가면 휴대전화 문자로 찍어 보냈는데 땅에서보다 빨리 써졌어요. 정신이 고양돼서 모든 이치에 오차가 없었어요.”

-언제부터 생긴 증상인가요?

이창근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정리해고 반대 고공농성’ 응원) 때 부산까지 걸어가는데 몸이 하나도 안 아팠어요. 마감이 촉박하면 행진하다가 다리 밑에 들어가서 썼어요. 그게 될 수 없는 조건인데 그게 됐어요. 몸이 아파야 되는데 아프지가 않은 거예요. 생각이 점점 또렷해지고 세상만사가 통찰됐어요. 오감이 열렸다고 생각했는데 조증이 온 거였어요. 희망버스 마치고 올라오면서부터 약을 먹었어요.”

이창근이 김정욱을 보며 말했다.

“대법원에서 진 날(2014년 2월 고등법원의 해고무효 판결을 같은 해 11월 대법원이 파기환송) 말이야. 다들 낮부터 술 먹고 뻗었잖아. (김정욱 “나도 그때 많이 울었어.”) 난 입장문 써서 발표하고 방송사 인터뷰하느라 밤부터 술을 마셨어. 새벽 5시까지 폭음하면서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 이상하게 해법이 간단해 보이고 자신감이 생기는 거야. 굴뚝에 올라가겠다고 결심하니까 정말 미련이란 게 100% 없었어. 집도, 아내도, 아이도.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어.”

지난 1월26일 김정욱(왼쪽)과 이창근이 2년 전 고공농성을 벌였던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굴뚝을 바라보고 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월26일 김정욱(왼쪽)과 이창근이 2년 전 고공농성을 벌였던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굴뚝을 바라보고 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미련이 있어야 되는 건데요.

이창근 “공장경비대가 침탈할 거란 두려움이 있었어요. 반대쪽 굴뚝을 타고 넘어올 것 같은 거예요. 밧줄을 던져 거리를 측정하기도 했어요. 식사 때 올라온 젓가락은 내리지 않고 모았어요. 무기로 쓰려고요. 그런 생각으로 밤에 잠을 못 잤어요. 제 머리하고 전쟁을 한 거예요. 생각이 생각을 밀고 나갈 때가 있는데요….”

‘생각에 밀려 도달한 생각의 끝’을 이창근이 들려줬다. “이건 쓰지 말아 달라”며 굴뚝에서 그가 본 것들을 이야기했다. 정확하게는 ‘그의 눈에만 보인 것들’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김정욱은 낮게 탄식했다.

김정욱 “마힌드라 왔을 때였어?”

이창근 “교섭이 안 풀리고 지지부진했을 때.”

고공농성에 돌입하는 노동자들은 대개 하늘과 땅의 역할을 나눴다. 하늘의 최우선 임무는 무사히 견디는 것이었다. 교섭과 투쟁은 땅이 맡았다. 땅에서 진행되는 일들은 한 호흡 늦춰 알리거나 적절히 걸러 하늘로 타전했다. 땅의 일희일비에 출렁일수록 하늘에 의탁한 노동자들은 위험해졌다. 쌍용차 굴뚝은 달랐다. 하늘에서 이창근이 기획을 주도했다. 정체된 교섭을 타개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자신과 동료들을 다그쳤다.

이창근 “나는 올라갈 때부터 굴뚝에 오래 있지 않겠다고 다짐했어. 고공농성이 길어질수록 결과가 좋은 곳이 별로 없었으니까. 단기간에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강박이 컸던 것 같아. 그래서 끊임없이 뭔가를 추진했고, 형과 동지들을 힘들게 했어. ‘내 판단이 맞는데 내 말대로 안 움직이냐’며 답답해했어. 내가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내려오고서야 알았어. 굴뚝에서 내려다본 세상과 땅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전혀 다르다는 걸.”

“많이 비참했다”

땅에서 잊힌 노동자들은 하늘에 올라 스스로를 사건화한다. 짧게 주목받던 농성이 장기화되고 고공의 삶이 땅에서처럼 일상이 되는 순간 그들이 매달린 하늘만큼 위험한 절벽은 없다. 낙타가 등에 난 혹의 지방을 짜먹으며 사막을 견딜 때, 퇴로 없는 노동자들은 자신과 동료를 갉아먹으며 하늘을 버틴다. 이창근이 지옥을 살고 있을 때, 김정욱은 이창근의 지옥이 만든 지옥에 있었다. (당시 굴뚝으로 전화했을 때 그는 “눈앞의 새처럼 날고 싶다”고 했다. 그가 뛰어내리려는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김정욱은 별도의 텐트를 쳤고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김정욱 “오늘 창근씨 말을 들으니까 ‘많이 아팠구나’ 알겠어요. 그땐 창근씨와도 못한 이야기들이 있어요. 내려와서도 투쟁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굴뚝의 일들을 꺼내지 못했어요. (이창근 “이젠 이야기해.”) 창근씨의 거친 언어가 튀어나왔을 때 언젠가부터 견디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창근씨가 그 정도로 아픈지는 몰랐지만, 저도 창근씨의 아픈 시간을 온전히 겪어야 했어요. 굴뚝의 높이감도 사라졌고요. 한 발만 내디디면 땅의 사람들 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창근 “형의 그 상태가 86~87일째쯤이었어.” 두 사람의 기억은 조금 달랐다. 김정욱 “나는 그때가 60일째쯤이었던 것 같아.” 김정욱은 훨씬 일찍부터 힘들어하고 있었다.) 저를 보호해야겠다고 느꼈어요. 내려와서도 회복이 안 됐어요. 바로 만나는 것보다 시간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창근 “정욱이 형과 저는 성격이 딴판이에요. 형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널 만큼 꼼꼼해요. 어떤 상황에 몰려도 방법을 만들어내는 차분함이 있어요. 저는 그렇지 못하고요. 정욱이 형이 사무국장이니까 공장 안 노동자들과의 다리 역할을 해주길 바랐어요. 당시 제 눈엔 형이 그 일을 잘 안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86~87일째쯤 됐는데 형이 텐트 밖으로 안 나와요. ‘나와서 바람 좀 쏘이라’고 하니까 텐트 문을 열고 형이 그랬어요. ‘창근씨 답답해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어요. 위험하다 싶었어요. 저는 형을 내려보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내려가서 막힌 교섭의 돌파구를 내라’고 몰아붙였어요. 형이 저를 못 견디고 내려가도록 맹렬한 욕설로 도발했어요. 형은 다르게 받아들였을 수 있어요. 그땐 그게 제 논리였어요. 미쳐 있었던 거지요.”

김정욱 “같이 있으면 둘 다 망가질 것 같았어요. 지부장은 창근씨 상황을 알면서도 저더러 ‘버티라’고 했어요. 제가 더는 견딜 수 없었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네가 버텨줘야 한다’고요. 화가 나고 감정이 북받쳤어요. 오랫동안 의지해온 사람이 저를 외면하는 것 같아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어요. ‘내가 죽어서 내려가는 거 볼래요’ 하고요.”

하늘의 지옥이 무거워질수록 땅도 지옥의 가위에 눌렸다. 하늘이 가팔라지면서 땅에서 하늘을 지키는 동료들의 고됨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굴뚝을 도왔던 해고자들과 연대자들이 굴뚝에 찔렸다. 서로의 고통을 보려 하지 않는 곳이 지옥이었다. ‘기업이 잘돼야 노동자도 잘된다’는 신화와, ‘기업이 잘돼도 노동자는 잘못될 수 있다’는 현실의 간극에 무감할 때, ‘지옥 같은 세상’은 자랐다. 그 간극을 좁힐 의지 없는 정치가, 노동자를 하늘에 몰아넣고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 안도하는 세계를 대표할 때, 굴뚝은 공기처럼 퍼져나갔다.

이창근이 굴뚝에서 아팠을 때
김정욱은 이창근 견디며 아팠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했다”
퇴로 잃은 노동자들 자신과 동료
갉아먹으며 하늘 벼랑 버틴다

복직한 이창근과 복직 유예 김정욱
다른 길 선택한 그들의 지난 1년
“복직으로 가장 안심이 되는 건
뭔가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
“더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다”

김정욱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우리는 아프고 힘들었어요. 아픈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을 풀어내고 서로의 아픔에 공감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요. 굴뚝에선 그러지 못했어요. 살려고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옆 사람을 힘들게 했어요. 우리만 그랬던 건 아니에요. 김진숙 지도위원(309일 크레인 농성)도 겪었고, 차광호(복직을 요구하며 스타케미칼 굴뚝에서 408일 고공농성) 동지도 힘겨워했어요. 죽지 않으려면 싸워야 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힘듦을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토해내는 일들이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직시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김정욱은 “굴뚝에서 내려가면서 많이 비참했다”고 했다. “사람들이 보기 싫었고 숨고만 싶었어요. 마음 문이 닫혀 버렸어요.” 이창근은 “혼자 있으면서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고 했다.(착륙 이튿날 전화 통화에서 그는 “(김정욱이 내려간 뒤) 외롭고 무서웠다”고 했다.) 묵은 통증의 끝을 잡아당긴 뒤부터 서로의 앞에서 눌러왔던 이야기가 실처럼 뽑혀 나왔다. 시선을 맞추고, 말을 섞었다. 간간이 웃기도 했다.

땅을 밟았다고 굴뚝이 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노동자들에게 땅도 굴뚝 높이만큼 파였다. 김정욱은 ‘땅멀미’에 시달렸다. 굴뚝의 긴장을 움켜잡고 24시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이창근은 달팽이관 이상으로 어지럼증을 앓았다. 전정신경염과 조울증 약을 합쳐 한번에 15~20알씩을 먹었다. 두 사람 모두 심리치료를 받았다.

김정욱(왼쪽)과 이창근이 2015년 3월 굴뚝농성 해제 뒤 2년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정욱(왼쪽)과 이창근이 2015년 3월 굴뚝농성 해제 뒤 2년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각자의 굴뚝에서 완전히 내려온 건 언제였어요?

이창근 “복직한 뒤였으니까 오래 걸렸어요. 공장 복귀하고 나서도 갈등이 좀 있었어요. 야근 끝나고 해장국을 먹는데 저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요. 같이 밥 먹던 동생도 불편했는지 가서 그러는 거예요. ‘맞아. 이창근 맞아. 맞으니까 그냥 아는 체해.’ 7년 만의 복직이라 사람들이 저를 모를 거라 생각했어요. 생각해보니 모를 리가 없겠더라고요. 지난해 6월쯤이었어요.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이 뛰었구나’ 싶었어요. 당분간만이라도 그만 뛰어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김정욱 “2015년도 집행부 임기를 마치고 지부 활동과 거리를 뒀어요. 지난해 8월 고향인 곡성으로 내려갔어요. 12월엔 주소도 옮겼고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들판을 걸으면서 조금씩 편해졌어요.”

두 사람의 임기 종료 직전 노-노-사는 복직안에 합의했다. ‘2017년 상반기까지 조속한 채용 노력’이란 합의 내용이 쟁점이었다. 복직 시한을 특정하지 않는 ‘노력’을 두고 지부 내에서 찬반이 갈렸다. 복직 순서(투쟁 참여·기여도 등을 평가해 점수로 환산)를 정할 때도 힘든 시간을 겪었다. 1차 복직·채용 인원 40명(해고자·명예퇴직자·신규채용자 3 대 3 대 4 비율 할당) 중 해고자는 18명(정규직 해고자 12명+비정규직 해고 뒤 정규직 전환 6명)이었다. 두 사람 다 지부의 우선복직 대상자였으나 다른 선택을 했다. 김정욱은 복직을 유예했고, 이창근은 복직했다.

“스스로를 살리려고”

-왜 복직하지 않았나요?

김정욱 “합의안에 반대했어요. 모두(186명) 함께 공장으로 돌아가는 안이 아니었으니까요. 복직 순서를 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자본이 노동자를 잘라내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동료들을 독려하며 이끌고 온 한 사람으로서 미안했어요. 복직을 미루는 것이 제가 책임지는 방법(김득중 지부장은 마지막 순번 자청)이었어요.”

-더 나은 합의를 위해 싸우자고 한 본인이 정작 지부 활동에서 멀어졌는데요.

김정욱 “합의 이후 힘들었어요. 각자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 얼굴을 보는 게 불편했어요.”

김정욱은 ‘생계’에 나섰다. 4~5개월은 대리운전을 했고, 민주노총의 지역노동 실태조사 일을 두 달 했다. 2016년 여름엔 ‘해고자 형님’을 도와 에어컨 설치기사로 일했다. 여름의 끝에 그는 “스스로를 살리려고” 곡성행을 택했다. 곡성엔 홀어머니가 계셨고, 에스엔에스로 굴뚝농성을 응원해준 귀농인들이 있었다.

-굴뚝에 있을 때 ‘해고자 신분을 내려놓고 복직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복직했어요.

이창근 “그땐 진심이었어요. 굴뚝에서 힘드니까 해고자 신분을 던져서라도 돌파구를 내고 싶었어요. 내려왔는데도 힘이 들었어요. 그 시간을 겪으며 마음이 바뀐 거예요. 두 가지 마음 다 진심이에요. 그렇게밖에 설명할 말이 없어요.”

-오랜만에 일을 하니까 어땠나요?

이창근 “처음엔 힘들었어요. 투쟁할 때 쓰는 근육과 일할 때 사용하는 근육은 다른가 봐요. 석 달 정도는 파스도 많이 붙였어요. 야간근무가 특히 힘들었어요. 해고 전보다 일이 늘었어요. 잔업까지 하면 하루에 제 앞으로 180여대가 지나갔어요. (김정욱 “해고 전엔 150대쯤 했던 것 같은데.”) 회사는 인원을 늘리는 대신 노동강도를 높였어요. 정리해고를 겪었던 사람들이라 언제 회사에 위기가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다들 일에 파묻히는 것 같아요.”

쌍용차 조립 3개 팀 중 이창근이 일하는 1팀만 주야 맞교대를 했다. 2001년 쌍용차에 입사한 이창근은 복직 뒤 2008년 입사자로 조정됐다. 정규직 복직자들의 해고 기간은 근속에서 빠졌다. 불법파견을 인정받은 비정규직 해고자들은 정규직으로 복직하며 해고 기간을 근속으로 얻었다. 해고 전 이창근의 후배들이 복직 뒤 그의 선배들이 됐다. 급여도 역전됐다.

이창근 “수당까지 합하면 액수 차이가 커요. 쓰러진다 쓰러져.(웃음) 돈 자체보다 회사가 정리해고의 책임을 해고자에게 지우는 것 같아 억울해요. 지난 7년을 부정당하면서 우리가 부정당하는 것 같아 스트레스가 많아요. 복직하니까 국가도 기다렸다는 듯 월급을 가져갔고요.”

2015년 3월 굴뚝농성 해제 뒤 김정욱(왼쪽)과 이창근이 서로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 놓기까지 2년이 걸렸다. 어색해하던 두 사람은 눌러온 마음을 풀어내면서 다시 시선을 맞추고, 간간이 웃기도 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5년 3월 굴뚝농성 해제 뒤 김정욱(왼쪽)과 이창근이 서로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 놓기까지 2년이 걸렸다. 어색해하던 두 사람은 눌러온 마음을 풀어내면서 다시 시선을 맞추고, 간간이 웃기도 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09년 옥쇄파업 직후 국가는 노조 간부들의 퇴직금에서 1천만원씩을 일괄 압류했다. 그때 가져가지 못한 금액만큼 복직 뒤 네 달 동안 나눠 떼갔다. 경찰은 파업 진압 때 발생한 손해(지연이자 포함 15억원)를 배상하라며 소송(대법원 계류 중)을 냈다.

-2017년 상반기가 지나도 복직 대기자들의 기약 없는 기다림은 계속될 것 같은데요.

김정욱 “해고자들은 복직에 모든 삶을 걸고 있는데 회사가 희망고문을 하는 것 같아요. 과연 복직이 될까 걱정하며 많이 힘들어해요.”

이창근 “아직 150명 가까운 해고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회사는 ‘노력’이란 단어 뒤에 숨지 말고 서둘러 복직을 이행해야 돼요.”

-복직 이후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어요.

이창근 “허무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많았어요. 건강검진을 못 받아 몸에 병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사망하거나 자다가 심장마비로 숨이 멎기도 했고요. 복직 뒤 가장 안심되는 건 뭔가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거예요. 계획이 가능한 삶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해고자에겐 엄청난 차이예요. 복직하지 못했다면 주강이 야구도 못 시켰을 거예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치유란 걸 알겠어요.”

직업. 직(職)이 업(業)이란 것. 일과 삶이 카르마로 얽혀 있다는 것. 일을 갖고 그 일로 꾸린 일상은 일을 잃으면 무너진다는 것. ‘업으로서의 직’을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처럼 삶과 죽음으로 격렬하게 입증한 사례는 없었다. 삶이 깨진 자들에게 지옥의 반대는 천국이 아니다. 지옥은 천국의 도래가 아니라 파괴된 일상이 회복될 때 멈출 것이었다.

2015년 1월5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굴뚝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정욱(오른쪽)과 이창근이 굴뚝 건너편에 지지 방문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평택/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015년 1월5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굴뚝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정욱(오른쪽)과 이창근이 굴뚝 건너편에 지지 방문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평택/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곡성에선 무엇을 찾고 있나요?

김정욱 “올해는 농사를 지어보려고 해요. 아버님 돌아가시고 심은 감나무가 네 살이 돼서 감이 좀 열릴 것 같아요. 다른 농사도 생각해봤는데 마을 어른들이 ‘있는 거나 잘하라’며 말리시더라고요. (이창근 “잘못 덤볐다간 골병만 들어.”) 곡성 내려가면서 아내한테 월 100만원은 만들어주겠고 약속했어요. 그 말 지키려고 배추 절임 일도 하고 가래떡 포장일도 했어요. 봄 되면 방역일도 해보려고요. 그러면서 지역 분들과 모색하는 게 있어요.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다 귀농한 분들과 건강한 마을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백남기 어르신 돌아가셨을 땐 분향소도 설치했고, <김정욱들>도 같이 봤어요. 곡성농민회에도 가입했고요. 협동조합 밥집과 반찬가게도 올해 시작해요. 지방자치를 고민하는 단체를 만들어서 제가 간사 역할도 맡았어요. 무엇을 위해 살지 계속 찾아가는 중이에요. 더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요. 사람과의 관계를 지킬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어요.”

-(이창근에게) 어떤 것 같아요?

김정욱 “못 마땅하죠?(웃음)”

이창근 “굴뚝과 복직 공백의 여파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형 스타일과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평택으론 안 돌아올 건가요?

김정욱 “잘 모르겠어요. 곡성에 내려간 뒤 몸과 마음이 나아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난해 10월쯤인가 술을 좀 많이 마셨는데 갑자기 서글퍼지는 거예요. 마을에서 가깝게 지내는 분한테 전화해서 펑펑 울었어요. 제가 아직 동료들에게 묶여 있다는 생각에 울컥했어요. 그들을 두고 온 게 미안했던 것 같아요. 제가 책임을 다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노동자답게 제 몫을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복직할지는 그 과정에서 생각해 보고요.”

이창근 “돌아와야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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